‘만원관중’ 부른 레이 첸은 파격적 연주로 거침없이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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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29일 롯데콘서트홀대만계 호주 바이올리니스트인 레이 첸은 2009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쥔 것을 계기로 세계적인 스타 연주자의 위치에 올랐다. 이번 공연에서 서울 롯데콘서트홀은 이틀 모두 만석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객석에 빈자리가 거의 없었던 것은 국내에도 그의 인기가 상당함을 방증하는 광경이었다. 심지어 서울시향의 공연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합창석까지 공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한 연주자가 연이틀 이어지는 두 공연에서 서로 다른 협주곡을 연주한다는 사실도 이런 흥행에 어느 정도 이바지하지 않았을까 싶다.
레이 첸-서울시향 공연 열려
'미지의 극한 향한 여정을 그려내다'
멘델스존, 차이콥스키 협주곡
오케스트라와의 합 어긋났지만
자유로운 해석으로…흥미 불러내
레이 첸이 금요일(6월 28일) 공연에서 연주한 것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그가 굉장히 들떠 있다는 것은 연주를 시작하기 전부터 알 수 있었는데, 실제로도 2악장을 제외하면 거의 쉴 새 없이 어깨를 들썩이면서 연주했다. 거의 조증에 가까운 흥분이었는데, 이런 감정 상태는 솔직히 말해 멘델스존의 협주곡과 썩 어울린다고는 말할 수 없다. 크라이슬러의 ‘중국의 북’ 같은 곡이라면 모를까. 또 악구 사이를 거의 끊지 않고 연주했는데, 이런 연주는 긴 호흡을 유지하는 데는 좋지만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추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독주자가 잘 대처할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파악한 바로는 레이 첸은 처음부터 이 문제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템포에 미세한 변화(이를 ‘아고긱’이라고 부른다)를 엄청나게 부여했고 셈여림도 파격적일 만큼 끊임없이 변경했다. 독주자가 연주에 풍부한 표정을 부여하고자 할 때 흔히 사용하는 기법이기는 하나, 이처럼 거의 매 악구 표정이 달라진다면 연주에 일관성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진다. 레이 첸은 차분한 분위기의 2악장에서는 비교적 절제된 태도와 깔끔하고 미려한 음색으로 연주했는데, 1714년산 ‘돌핀’ 스트라디바리의 풍부한 음색이 잘 살아난 연주였다.
그러나 1악장과 대동소이하게 흘러간 3악장에서는 오케스트라와 서로 어긋난 대목이 많았고, 음정 실수도 더 많아 아쉬움을 남겼다. 레이 첸은 청중의 열화 같은 환호에 응해 앙코르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제3번’ 중 ‘전주곡’을 연주했는데, 역시 상당히 자유분방한 해석이었지만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좋은 연주였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바흐의 곡처럼 딱딱하고 엄격해 보이는 작품에서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가 오히려 더 많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점이다.토요일 공연(6월 29일)의 차이콥스키 협주곡에서 레이 첸은 상대적으로 진지해진 표정과 자세로 연주에 임했지만, 연주의 변칙성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템포, 리듬, 셈여림, 음색 등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요소가 끊임없이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실수가 적잖게 나왔다는 점은 덤이다. 연주자가 자신만의 해석을 위해 악보에서 일탈하는 것은 흔하며, 심지어 어느 정도 바람직하기까지 한 일이다. 다양한 해석은 작품의 지평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곡이 이렇게도 들릴 수 있구나’ 싶어 놀란 적이 여러 번 있다.그러나 연주자가 이런 긍정적인 충격을 청자에게 전해줄 수 있으려면 스스로 명확하고 일관된 방침을 세워두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레이 첸의 해석은 그저 ‘변칙 그 자체를 위한 변칙’이었고, 이런 태도는 해석의 지평을 넓히는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그가 앙코르로 연주한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 중 ‘21번’과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이 곡은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나 제3번’ 중 ‘전주곡’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전날과의 연계를 고려한 선곡 같았다) 역시 해석 자체는 비슷했지만, 이런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은 해석의 여지가 많으므로 앞처럼 강한 위화감은 들지 않았다.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는 멘델스존의 협주곡에서는 상당히 소극적인 반주를 들려주었고,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에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다분히 담담하고 초연한 태도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갔다. 하지만 이것을 지휘자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어 보였다. 레이 첸의 연주는 지휘자가 맞춰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냥 큰 줄기만 맞추는 수준에서 넘어가기로 한 듯했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달리 도리가 없을 듯했다.페트렌코는 40대 후반으로 지휘자로서는 아직 꽤 젊은 편이지만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15년간 역임하는 등 오래전부터 경험을 쌓은 노련한 지휘자이다. 불과 1주일 전, 그러니까 6월 21일(금)에는 역시 서울시향과 함께 무대에 올라 마케도니아 출신 피아니스트 시몬 트릅체스키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협연했고, 이어 드보르자크 ‘교향곡 제8번’을 지휘해 훌륭한 해석을 선보인 바 있다.이틀 모두 첫 순서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오이리안테> 서곡이었다. 오페라 자체는 썩 성공적이지 못해 오늘날에도 어쩌다 공연하는 정도이지만 서곡은 비교적 자주 연주된다. 연주는 이틀 모두 성공적이었는데 굳이 말하자면 토요일 공연 쪽이 더 정제된 편이었다. 페트렌코는 현을 중심으로 유연하고 풍부한 연주를 이끌어냈으며, 셈여림을 적절히 구사해 뚜렷한 대비를 보여주었다. 토요일 공연의 경우 여기에 더해 초점이 한층 명확하고 각 파트의 연계가 긴밀해졌다.이틀 모두 후반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영웅의 생애’가 연주되었다. 워낙 편성과 규모가 큰 대작이고 연주 기술적인 면에서도 만만찮은 작품이라 연주하는 경우가 무척 드문 작품이다. 페트렌코는 금요일 공연에서는 다소 거칠지만 무척 생생한 연주를 들려주었고, 토요일에는 활기는 좀 덜할지 몰라도 한층 원숙하게 다듬어진 해석을 선보였다. 일단 제1부 ‘영웅’은 다소 혼란스러웠던 금요일에 비해 잘 정돈된 토요일 공연 쪽 손을 들어줄 만했다. 금관은 이틀 모두 충분히 강렬하고 웅장했으며, 특히 제4부 ‘전쟁터의 영웅’은 위압적이면서 박진감이 넘쳤다.
다른 예술에서도 그렇겠지만, 음악에 정답은 없다. 수많은 오답이 있을 뿐이다. 오답 노트를 쌓아가는 가운데 정답이 무엇인지 모색해가는 것이 음악이 아닐까. 닿을 듯 말 듯 하면서도 끝까지 닿을 수 없는, 그 미지의 극한을 향해 수렴해가는 것이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의 숙명일 것이다.
황진규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