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대러외교, 긴 호흡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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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구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전격적으로 이뤄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 평양 방문과 ‘북·러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관계 조약’ 체결을 두고 일각에선 한·러 관계에 대한 사망 선고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조약 4조에서 1961년 ‘조·소 우호협조 상호원조 조약’ 1조와 거의 비슷하게 양국이 침략받았을 때 즉시 군사적 지원을 한다는 사실상의 군사동맹 조항을 규정해서다. 더욱 우려할 것은 이번 북·러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이 직접 러시아가 북한에 군사 기술을 제공하고 대북 제재를 무력화할 가능성을 언급한 점이다.
유엔 대북 제재를 무시하는 이런 러시아의 행동에 한국 정부는 새로운 독자 제재 발표, 수출 통제 품목 추가 지정과 함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재검토로 대응하고 나섰다. 향후 북·러 밀착 정도에 따라 최고 수준의 보복 가능성을 열어놓고 단계적으로 대응해나가는 것은 당연하다.다만 긴 호흡의 외교적 대응도 필요하다. 러시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으로서 자신이 참여한 대북 제재를 부정하는 모순적 행동을 하기는 쉽지 않다. 러시아에 안보리 이사국으로서의 책임을 촉구하는 국제 협력을 통해 러시아가 유엔 대북 제재를 제대로 준수케 하는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
중국이 북·러 군사동맹에 부정적 인식을 가질 가능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북·러 밀착은 서방국에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위협으로 간주되고, 이는 곧 한·미·일 공조를 더욱 강화시킬 가능성이 있어 중국에는 위험 요인이 된다. 중국과의 소통 강화는 북·러 밀착을 막는 외교 수단이 될 수 있다.
러시아와 수교한 이후 34년간 역대 한국 정부가 추진해온 북방정책의 외교적 자산은 적지 않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에서 많은 경제협력 의제가 논의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내용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지난 30여 년간 축적된 한·러 경제협력 성과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전쟁이 끝나면 기술과 자본을 가진 한국과의 경제 협력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러시아도 잘 이해하고 있다.결국 세심한 대러시아 경제외교 전략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러시아는 한·미·일 공조를 ‘아시아판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로 인식하고 새로운 유라시아 안보 구조에 북한을 편입시키려는 전략적 의도를 갖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북방정책 덕분에 러시아는 북한 비핵화에 전향적 입장을 유지했다. 이 같은 입장이 복구되도록 러시아와 소통을 재개해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다소 약해진 상황에서 이번 정상회담으로 대북 제재 무력화와 북한의 사실상 핵보유국 지위 인정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부 제동이 걸린 학술, 문화, 예술 교류를 지속해야 하고 민간 영역의 교류도 차차 활성화해야 한다. 한·러 간 일부 노선 직항 재개와 입국 시 전자여행허가(K-ETA) 절차 간소화는 민간 교류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러시아가 한국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국가임은 부연할 필요가 없다. 북·중·러 대 한·미·일의 신냉전 구도가 구조화되고 한국이 그 일선에 서게 되는 일이 없도록 현명한 대처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