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지나도 끝없이 찬사 받을, 연출의 귀신 박찬욱의 '동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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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오동진의 아웃 오브 넷플릭스지난 4월과 5월 사이, 쿠팡 플레이에 공개된 박찬욱의 7부작 드라마 ‘동조자’는 HBO를 통해 해외에서 공개된 것에 비해 국내에서는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두 개의 세계를 떠도는 귀신 같은 존재’에 대한 고급한 담론의 드라마가 국내 OTT 드라마 수용층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조자’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한 첩자의 이야기이자, ‘조국의 독립과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국도 아니오, 독립도 아니고, 자유도 아닌, ‘없다’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식의 선문답 형의 철학적 질문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HBO 오리지널 시리즈 '동조자'
박찬욱은 이념과 국가에 대해 워낙 냉소적이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그다지 믿음이 없는, 니체식 허무주의나 역사에 대한 거대한 상실감을 지닌 인물이다. 박찬욱은 모든 자신의 사상과 예술혼, 감각, 그 총합을 이번 드라마에 쏟아 부었다. 이런 드라마는 당장에 인기를 모으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앞으로 30년이나 50년, 아니면 100년 후에도 꾸준히 언급될, 지적인 예술작품이다.비엣 타인 응우옌의 원작 소설을 드라마로 만든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주인공인 대위(호아 수안데)의 진술서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는 공산화된 베트남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1년 동안 독방에 갇힌 채 자신의 지난 행적을 끊임없이 쓰고, 또 쓰고, 또다시 고쳐 쓰고, 반복해서 쓰는 과정을 통해 사상검증을 받는다. 박찬욱의 연출(엄밀하게 얘기하면 3부까지가 박찬욱 연출이고 4부는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5부에서 마지막 7부까지는 마크 먼든이 연출했다. 박찬욱은 전체 시나리오를 썼고 총연출의 역할을 맡았다. 이를 쇼 러너 감독이라 부른다.)은 이를 해체하고 이어 붙이되 종종 이런 과정이 주인공의 기억을 플래시백으로 되돌려 재생하고 있음을 중간중간 환기시키는 구성으로 짜 놓은 것이다. 이런 식의 복합적인 시나리오 구성과 작성은 소설 원작을 쓰는 것보다 더 힘든, 고난도의 것으로서 어쩌면 차라리, 소설을 쓰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텍스트를 영상으로 입체화 시키는 것도 정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원작 소설 <동조자>의 66쪽에서 90쪽에 이르는 제3장은 대위 일행, 그리고 장군(토안 레)의 가족과 비밀경찰들이 사이공 함락 이후 베트남을 탈출하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이들은 미군이 제공한 수송기 C-180을 타고 떠나야 하는데 이때 북베트남 정규군의 폭격이 빗발친다. 소설의 이 부분을 읽고 있으면 머릿속에 이미지들이 잔뜩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지만 이를 몇 개의 시퀀스와 씬으로 이어 나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공정의 과정이다. 비행장까지 가는 버스 안은 세트에서 촬영했을 것이다. 이륙하는 비행기의 동체는 실물이었을 것이며, 연속해서 이루어지는 폭발은 CG였을 것이다. 이륙하는 비행기 꽁무니를 향해 달리는 극 중 인물들의 모습은 실사와 CG를 합성했을 것이다. 드라마 ‘동조자’의 에피소드1에 나오는 사이공 탈출 장면은 이 드라마 전체에서 압권이며 박찬욱의 영화 디자인 능력과 아이큐 지수가 최고조로 발휘된 것임을 보여 준다.1부에서 3부까지가 뛰어난 작가의 역량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었다면 영화 팬 입장에서는 페르난도 메이렐레스가 연출한 4부가 가장 흥미로울 수도 있다. 주인공 대위는 별 난 성격의, 아니 미친 성격의 영화감독 니코스 다미아노스(로버트 다우니 Jr.)가 만드는 베트남전 영화의 자문을 맡아 영화 현장에 참여하는 일을 한다. 이 4부는 주인공 대위의 어린 시절, 엄마와의 기억과 트라우마, 그의 삼총사 격의 의형제 같은 친구들의 엇갈린 관계들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필수적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나왔던 베트남전 영화나 드라마들이 얼마나 심각한 정신병적 상태를 겪으며, 가까스로 완성된 것인가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어서 매우 흥미롭다.메이렐레스 감독은 이 4부의 에피소드를 프란시스 F.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제작기나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을 연상하게끔 찍었다. 드라마 속 영화의 미친 대위(데이빗 듀코브니)는 ‘지옥의 묵시록’의 대령(말론 브란도)이나 ‘플래툰’의 중사 반스(톰 베린저)을 합친 캐릭터이고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미군 역(존 조)은 ‘플래툰’의 윌렘 대포를 연상시킨다. 4부는 명백하게 지금까지 만들어져 온 베트남 영화들에 대한 메타 비평과 같은 에피소드이며 역설의 오마주를 담고 있는 스토리이다. 박찬욱은 드라마 ‘동조자’의 에피소드1을 시작하면서 이런 문구의 나레이션을 집어넣었다. ‘세상의 전쟁은 두 번 벌어진다. 한번은 전장에서, 그리고 또 한번은 기억 속에서.’ 그러나 드라마의 흐름 상으로 보면 그 글귀는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번은 전장에서, 그리고 또 한번은 반혁명의 과정에서.’
주인공 대위의 전쟁이 끝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면서까지 계속되는 이유는, 베트남 공산당이 천신만고 끝에 조국을 통일했다손 치더라도 사이공을 탈출한 장군 일파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전역에서 반 베트남 운동을 벌이고 반 혁명운동을 펼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공산당은 장군의 부관으로 심어 놓은 자신들의 유능한 첩자이자 밀정, 열혈 공산주의자인 대위를 전쟁이 끝난 후에도 탈출한 장군 휘하에 바짝 붙게 하기로 결정한다. 대위의 스파이 임무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는 이유이다.주인공 대위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점점 더 상실해 간다. 그는 사실 자신이 미국(식 자본주의)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대위는 일본계 미국 여자 소피아(산드라 오)와의 사랑과 질투에 눈이 멀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그 모든 걸 당을 위해서라고 자위하거나, 아니면 장군의 계획을 무산시켜 무모한 군사작전에 동원될 친구를 보호하겠다는 변명을 내세울 뿐이다. 대위는 자신이 어느 쪽 편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대위가 이렇게 된 데에는 명백히 반 혁명 운동의 분위기를 염려했던 당의 노선 때문이다. 이런 얘기는 5부~7부에서 펼쳐지는데 드라마 속 장군과 베트남 난민들은 실제로 사이공 침공 계획을 세우고 군사 훈련까지 진행한다. 그건 마치 쿠바 난민들의 반 카스트로 운동을 벌이다 CIA와 매파 의원의 지원을 받아 피그스만 침공 사태를 일으킨 것과 같은 모습이다.
주인공 대위와 그의 친구 본(프레드 응우엔 칸)은 인도네시아를 거쳐 사이공에 잠입하는 군사작전에 참여하다 베트남 공산 정규군에 체포돼(이것 역시 대위가 사전에 알려준 정보에 따른 것이다. 주인공은 결국 스스로 투항한 셈이 된다.)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가고 이 모든 진술서를 쓰게 되는 일의 시작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드라마는 머리에서 꼬리로, 꼬리에서 머리로 이야기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게 만든다. 드라마는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중층적으로, 삼단 케익을 다시 삼단, 또 다시 사단으로 쌓아 놓듯 겹쳐 놓은 것이다. 이념의 정체성을 상실한 한 기구한 스파이의 인생을 그리는 척, 베트남의 역사와 세계 공산화 과정에서 빚어진 냉전의 역사와 미국 내 사회 분위기를 그려 나가기도 하고, 영화 만들기의 추잡한 이면, 예술의 이중성에 대한 얘기를 슬쩍 끼워 넣기도 하고, <아시아 공산주의와 동양적 파괴방식>이라는 리처드 헤드의 학술적 이론(가상 인물이고 가상의 논문이다.)을 들먹일 만큼 학문의 깊이를 파헤치기도 한다. 이 7부작 드라마는 대하 서사의 영화이자 거대한 역사서이며 정치 군사학의 교과서인 동시에 영화학의 교본과 같은 작품이다. 한 마디로 위대한 업적의 작품이다.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이야기를 전환시키는 음악 선곡과 오리지널 작곡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델 샤논, 아이슬리 브라더스, 니나 시몬 등등 작품의 시대 배경에 어울리는, 레트로 감성이 돋보이는 곡들이 수놓아져 있다. 드라마 전체의 무늬와 색감에 영감을 불어 넣는다.
로버트 다우니 Jr.의 1인 5역(CIA요원 클로드, 해머 교수, 상원의원 네드 고드윈, 영화감독 니코스 다미아노스, 주인공 대위의 아버지이자 신부)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마케팅되고 있지만 ‘동조자’는 그 모든 걸 주도해 낸, 압도적인 시나리오와 연출 감각이 만들어 낸 결과의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옳다. 박찬욱의 이번 ‘동조자’는 그가 숙성의 단계를 넘어 마에스트로의 입지에 다다른 지 이미 오래됐음을 보여준다. 비평계의 찬사가 오래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