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 칼럼] 이사를 극한직업으로 만들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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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는 회사보다 자기 이익 우선공정과 정의의 이름으로 정부가 상법 개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회사를 위해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이사의 충실의무 조항을 ‘주주와 회사를 위해’로 변경하는 내용이다. 1500만 개미투자자의 정당한 권리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찬성하는 상법학자가 가물에 콩 나듯 귀하다. 학계만이 아니다. 대법원도 소관 부처인 법무부도 반대다. 합리성을 현저히 상실한 정책이어서다.
상법개정은 기업도전 해체 '자해'
‘민희진 사태’에 대입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주주 이익 충실’ 조항이 만들어지면 뉴진스 소속사 어도어 이사들은 시쳇말로 멘붕에 빠질 수밖에 없다. 80% 지분율의 방시혁 하이브 의장과 18% 소수주주 민희진 대표의 사생결단식 이해충돌을 합치할 방도가 없어서다. 방 의장의 손을 들어주면 ‘18%의 비례적 이익을 무시했다’며 서슬 퍼런 민 대표가 반발할 것이다. 민 대표를 거들면 ‘자본다수결 원칙’의 부정이 된다. 지분만큼 의결권을 행사하고, 다수결로 의결하는 주식회사 제도의 절대법칙 말이다.이사진이 감당하지 못할 더 근본적 딜레마는 주주 이익과 회사 이익의 불일치다. 엔터테인먼트 회사 어도어의 지상 목표는 뉴진스의 지속 성장이다. 하지만 민 대표는 영향력 유지·확대와 사적 손익을 최우선할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방 의장도 다르지 않다. 수틀리면 뉴진스 해체 카드까지 꺼내 들 것이다. 주주 이익과 회사 이익의 동시 추구는 ‘미션 임파서블’이다.
이런 연유로 이사에게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부과한 입법례는 해외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 모범회사법은 ‘회사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믿는 방식으로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영국 일본 독일 캐나다 등도 마찬가지다.
상법 개정의 총대를 멘 실세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모든 주주가 합당한 대우를 보장받는 지배구조’를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는 합당한 대우를 넘어선 특별한 대우의 요구라는 점이다. ‘1주=1표’ 원칙에 의거해 지금도 모든 주주는 배당, 신주 배정, 의결권 등 모든 사안에서 비례적 이익을 보장받는다.합당한 대우를 넘어 소액주주를 더 배려하자는 주장에도 일정 부분 동의할 수 있다. 실제로 작동 중인 소수주주 우대 장치가 적잖다. 감사 선임 시 최대주주 의결권 제한(3% 룰), 감사위원 분리 선출 등이다.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 등에서 주주가치 훼손 논란이 제기됐지만 이후 ‘매수청구권 부여’ 등 여러 보완책이 강구됐다.
필요하다면 더 세심하고 적극적인 주주 보호장치 도입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기업 헌법’ 격인 상법 원리를 허무는 조치가 허용될 순 없다. ‘큰 사고를 막겠다’며 고속도로 속도 상한을 시속 80㎞로 제한하는 게 어불성설인 것과 마찬가지다. 포이즌필, 차등의결권 같은 경영권 보호 장치가 미비한 거의 유일한 선진시장이 한국이라는 점도 고려할 요소다.
비합리적임에도 상법 개정 주장이 힘을 받는 것은 ‘바이(buy) 사이드’의 열광적 지지 덕분이다. 바이 사이드는 자산운용사, 헤지·사모펀드, 연기금, 보험사, 개인투자자 같은 ‘매수측’이다. 막대한 자금력과 머릿수를 겸비한 자본시장 내 ‘갑(甲)’이다. 특히 단기 고수익 위주의 행동주의 펀드들이 개미투자자를 등에 업고 맹활약 중이다. 그들에게 주주 권리 확대는 수익 기회 확대와 동의어다.
상법 개정은 더불어민주당이 2년여 전 참여연대 등과 손잡고 시동을 걸었다. 윤석열 정부는 연초만 해도 반대였지만 ‘밸류업’을 화두로 꺼내면서 돌변했다. 대통령실까지 나서서 반대 세력을 제압 중이라는 후문이다. 이사를 극한 직업으로 만든다면 선진 한국의 최대 동력인 기업 섹터의 창의와 모험정신을 해체하는 자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