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억대 부자들 다르네"…요즘 '이것'에 눈독 들인다

차별화된 상품 찾는 부자들

펀드·ETF 등 '판박이 상품' 꺼리고
일반 투자자 잘 모르는 기업에 눈독
사모금전신탁 등 생소한 상품 '불티'

"1000억 맡길테니 포트폴리오 달라"
추천만 받던 부자들, 이젠 운용 지시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게티이미지뱅크
#지난달 인공지능(AI) 반도체 설계회사 텐스토렌트에 투자하는 신기술사업투자조합 상품이 1주일 만에 ‘완판’됐다. 애플, AMD, 테슬라를 거친 ‘반도체 설계의 전설’ 짐 켈러 최고경영자(CEO)가 창업한 비상장 스타트업이다. 삼성증권이 1000억원 이상 자산가들에게만 독점 판매했는데, 모집액 650억원이 금세 마감됐다.

#3000억원대 자산가인 A씨는 최근 미래에셋증권 프라이빗뱅커(PB)로부터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가 세운 AI 기업 xAI에 투자할 의향이 있냐는 전화를 받았다. 슈퍼리치들로부터 200억여원을 모아 투자하는 상품을 내놓을 예정인데 우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A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를 통해 5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일반투자자에게 생소한 금융투자상품이 초고액 자산가 사이에서 소리소문없이 팔려나가고 있다. 비상장 주식에 투자하는 신기술사업투자조합, 사모금전신탁, 사모대출펀드(PDF) 등 듣도 보도 못한 상품이 자산관리(WM) 시장에 등장한다. 이런 상품들은 리스크가 커 최소 투자금 10억원 이상, 자산 규모 1000억원 이상 자산가에게만 판매된다. 일반인은 정보를 알 수도 없고, 투자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자산 규모에 따라 WM 시장이 양분되는 이유다.

“판박이 금융상품 파는 시대 지났다”

2000년대 초 WM 시장을 지탱하던 주축은 주식 채권 펀드 세 가지였다. 초고액 자산가 대상 PB센터에서 파는 상품도 일반 영업점과 다르지 않았다. 급등하는 테마주를 잘 찍어주는 개별 종목 중심 주식 트레이더들이 PB업계를 주름잡은 배경이다. 이후 주가연계증권(ELS) 파생연계펀드(DLF) 등 파생결합상품이 쏟아져나왔다. 부동산시장 호황기 땐 건물과 토지 등을 담보로 발행하는 자산유동화증권(ABS)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등이 인기를 끌었다. 이런 상품은 은행 증권사 투자은행(IB)을 통해 고금리로 판매되며 투자자에게 짭짤한 수익을 안겨다 줬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시장 불확실성이 커지자 슈퍼리치들은 주식 부동산 등 전통 자산에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펀드, 상장지수펀드(ETF) 등 금융투자회사가 대량으로 찍어낸 ‘판박이식’ 상품보다 차별화된 구조화 상품을 찾는 수요가 늘었다. 금융투자회사도 예전엔 좋은 상품을 많이 파는 게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부자들의 세분화된 요구를 충족시켜줄 창의적인 상품으로 경쟁하는 시대가 왔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슈퍼리치가 상품 설계하고 운용 지시

구조화 상품으로 큰돈을 번 슈퍼리치들이 자본·정보·네트워크를 활용해 투자상품을 직접 제안하는 것도 최근 트렌드다. 이들은 수동적인 상품 구매 고객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자산 설계자로 변신했다. 텐스토렌트 투자의 경우 반도체사업을 하는 고액 자산가가 증권사에 공동 투자를 제안해 투자조합상품으로 만들어졌다. 정연규 삼성증권 SNI 상무는 “VIP 고객이 직접 소싱한 딜이 연간 수십 건”이라고 했다.

상장이나 회사채 발행, 증자 등 증권사의 주요 수입원이 될 수 있는 IB 거래를 패밀리오피스 고객으로부터 소개받기도 한다. IB 뱅커들이 회사를 찾아다니며 영업하지 않아도 기업을 운영하는 자산가들을 WM 시장에 가둬놓으면 관리보수도 받고 거래도 따낼 수 있어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다. IB업계 관계자는 “부자가 된다는 건 투자 기회가 많아진다는 뜻”이라며 “부자들은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투자해야 좋을지 누구보다 먼저 알기 때문에 이들이 WM 시장에서 투자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사모펀드와 증권사, 고액 자산가 간 삼각 협업도 늘고 있다. 작년 셀트리온과 셀트리온헬스케어가 합병할 당시 IMM자산운용은 싱가포르 테마섹에서 셀트리온 주식을 매수한 뒤 구조화해 증권사 패밀리오피스 고객에게 팔았다. 최저 수익률 연 5%를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1150억원어치를 판매했다.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이자와 원금을 받는 PDF나 대출채권담보부증권(CLO)도 중위험·중수익을 기대하는 슈퍼리치들에게 인기다. 한 PB는 “요즘 슈퍼리치들은 달러, 채권, 비상장 주식 등으로 직접 자산 배분 비율을 설계한 뒤 자신이 정한 내부수익률에 맞는 상품을 가져오라고 디테일하게 요구한다”고 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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