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와 '간장 계란밥'을 먹는 낭만 그리고 라벨의 '어미 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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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지중배의 삶의 마리아주-맛있는 음악김이 모락모락 진주같이 반짝이는 갓 지은 흰밥 위에 마가린 한 숟가락 툭, 반숙으로 익힌 계란 후라이를 올리고 간장을 휘리릭, 그리고 숟가락을 세워서 노른자를 터뜨리면 밥알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노오란 빛깔, 마지막으로 잘 비벼진 간장 계란밥을 입속에 넣었을 때 온몸에 퍼지는 그 따스한 맛과 동시에 엄마와 눈이 맞으며 느끼는 행복함은 모든 감각으로 기억하는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이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 들어보는 '옛날 옛날이야기'
한 그릇을 비우고 배가 빵빵해지면 곧 몰려오는 졸음에 엄마한테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며 졸곤 하였다. 그 시절 내가 빠져들었던 방송은 '배추도사와 무도사'가 들려주었던 옛날이야기와 '은비 까비의 옛날 옛적에'였다. ‘옛날 옛적에…’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 문장을 매우 좋아한다. 옛날이야기를 좋아했던 나는 그 무렵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를 처음 접했고 어릴 적 내가 입에 달고 살았던 첫 영어 문장을 배웠었다. ‘Once upon a time…’그때로부터 30여년이 훨씬 지난 오늘 난 딸아이와 독일 땅에서 간장 계란밥을 해 먹으며(마가린이 아닌 버터를 넣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세대가 달라도 3대가 공유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을 담은 음식이다. 예전에 이탈리아인 동료와 일본인 동료에게서 이와 같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은 식사가 그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들었다. 중북부 이탈리아 출신의 그 동료에게는 버터와 파마산치즈를 버무린 숏파스타, 일본인 동료는 흰 밥위에 가쓰오부시를 올리고 간장을 뿌려 먹는 네코고항이 그 추억이다.그렇게 소박하고 행복한 식사를 마치고 딸아이가 잠들기 전 이불속에서 얼굴만 쏙 내밀고 토끼 인형을 안고 나에게 말했다. “아빠, ‘옛날 옛날에’ 해줘 그리고 토닥토닥 해줘” 때로는 책을 읽어 주기도 하는데 딸아이도 책보다는 내가 손짓하며 지어내는 정체불명의 옛날 옛날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몇 해 전 가수 이적이 딸을 위해 동화책을 만들어서 출판했었다는데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옛날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나를 보자니 장르는 다르지만 같은 음악가로서 그의 능력과 추진력이 참으로 부럽다고 생각했다.
다시 텔레비전으로 보던 옛날 옛날이야기 시절로 돌아가서, 처음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접한 이후로 ‘미녀와 야수’는 나의 상상의 세계와 음악에 관련한 아이디어에 대해 끊임없는 영감을 주는 이야기 샘이 되어주었다. 서양의 전래동화 미녀와 야수는 예전에도 많은 어른에게 따듯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이야기였나 보다.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본인 스스로 음악과 결혼했다고 했다. 그래서 평생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지만, 아이들을 매우 좋아했던 사람이었다.라벨은 특히 자신의 친구 고데브스키의 아이들을 매우 아낀 듯하다. 특히 고데브스키의 딸인 미미는 라벨을 ‘미녀와 야수’ 등 옛날이야기들을 해주는 좋은 아저씨로 회상한다. ‘미녀와 야수’ 같은 이야기들이 라벨에게는 영감이 되어 고데브스키의 아이들을 위해 모음곡 <어미 거위 Ma mère l’oye>를 작곡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엄지 동자 그리고 미녀와 야수 등의 전래동화에서 얻은 느낌으로 그려지는 이 매력적인 <어미 거위 모음곡>을 지휘할 때면 마치 내가 그 이야기를 듣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라벨 - 어미 거위 Ma mère l’oye]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은 다시금 나를 돌아보게 하고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에 솔직하게 행동하게끔 한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음식들과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현재의 나를 만들었고 또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 기억들은 또 고스란히 나의 아이에게 전달될 것이다. 이서희 작가의 책 제목처럼 ‘어쩌면 동화는 어른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낭만을 완전히 버리지는 말아라, 앤. 조금은 낭만적인 게 좋아. 물론 지나치면 안 되지.지휘자 지중배
하지만 조금은 낭만을 남겨 둬, 조금은 말이야. –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