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퇴직연금 의무화의 전제조건

'무용지물' 디폴트옵션 개선하고
운용 규제 풀어 수익률부터 높여야

이상열 경제부장
2004년 말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 통과되고 1년 유예기간을 거쳐 시행된 퇴직연금제도는 출범 당시 큰 기대를 모았다. 외부에 적립금을 쌓아둬 회사가 파산해도 근로자가 퇴직급여를 떼일 위험이 사라지고 노후 안전판도 크게 확충될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1층 국민연금과 여유로운 생활을 보장하는 3층 개인연금 사이에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2층 퇴직연금이 새로 들어와 ‘노후보장 연금 3층 구조’가 제도적으로 완성됐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에선 국내 증시의 대세 상승을 이끌 수급 기반이 마련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가입자들이 실적배당형 투자 상품에 대거 몰려 코스피지수를 장기 우상향시킬 것이란 희망이 컸다.

올해로 퇴직연금을 도입한 지 20년이 되면서 이런 기대는 그야말로 헛된 꿈이었다는 게 입증됐다. 제도를 도입한 기업들이 매달 근로자 급여의 8.33%를 납부하면서 퇴직연금 적립금은 어느덧 400조원이 됐고 10년 뒤엔 1000조원까지 불어날 것이라지만 누구도 퇴직연금을 ‘2층 연금’으로 보지 않는다. 지난해 연금 형태로 퇴직연금을 받은 사람은 10%뿐이었다. 나머지 90%는 평균 1645만원을 일시금으로 받아 갔다.중도 인출을 너무 쉽게 허용한 이유도 있지만 정기예금 등 원리금 보장상품에 자금의 90%가 몰리면서 운용수익률이 물가상승률조차 못 따라갈 정도로 낮은 것이 핵심 원인이다. 국내 퇴직연금의 연환산 수익률은 최근 5년과 10년간 각각 2.35%, 2.07%에 그쳤다. 확정급여형(DB)이든 확정기여형(DC)이든 퇴직연금 가입자(기업과 근로자)는 투자 상품 및 비율을 스스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발생하는 손실(시장 위험)을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투자 및 금융상품 정보가 부족한 가입자 대부분은 원리금 보장형에 적립금을 방치했다.

이런 문제는 사실 다른 국가에서도 빚어졌다. 그래서 미국(401K), 호주(마이슈퍼) 등 퇴직연금 선진국이 2000년대 도입한 게 DC형 디폴트옵션이다. 이른바 ‘넛지 이론’에 기반해 가입자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하도록 설계해 연 7% 이상의 수익률을 거둘 수 있었다. 한국도 이들 선진국 사례를 참고해 작년 7월부터 ‘사전지정운용제’로 불리는 ‘한국형 디폴트옵션’을 시행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가 예견한 대로 한국형 디폴트옵션은 사실상 실패작으로 판명 나고 있다. 해외와 정반대로 가입자가 원리금보장 상품을 포함한 6~7개 상품 중 1개를 선택하도록 제도를 설계한 탓이다. 선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달라진 게 없다 보니 디폴트옵션 시행 후에도 만기도래한 자금의 90%가 원리금 보장형에 몰리고 있다. 현재 퇴직연금 운용체계는 사실상 지난 20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정부가 3일 ‘역동경제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퇴직연금의 단계적 의무화 방침을 밝혔다. 아직도 30%가 안 되는 퇴직연금 도입률을 높여 가계 자산 확충과 노후 대비를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강제 조치가 바람직하냐는 논란을 차치하고 설사 의무화하더라도 현재 운용체계 아래에서 정책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확실한 수익률 제고 방안부터 수립하는 게 먼저다. 원리금 보장형보다는 글로벌 자산에 장기 분산투자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디폴트옵션부터 재설계해야 한다. 같은 펀드인데 상장지수펀드(ETF)를 디폴트옵션 대상에서 빼놓고, 공모펀드보다 경쟁력이 높은 사모펀드마저 투자 대상에서 원천 배제하는 등 불합리한 운용 규제도 전반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가입자가 원하면 민간 전문가 등에게 운용을 맡기는 제도 도입도 검토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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