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모델 같은건 원래 없어…나 다운 무용수가 되고 싶을 뿐"

英로열발레단 발레리노 전준혁 인터뷰
솔리스트 진급 1년만에 '퍼스트 솔리스트' 승급
"준혁, 퍼스트 솔리스트로 승급하면 너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까?"
"안 될 이유가 있을까요? (Why not?)"

영국 런던 소재 '로열발레단'에 한국인 발레리노로서 처음 입단한 전준혁(26)은 지난주 수요일 발레단장과 1대 1면담 끝에 승급 소식을 전해들었다. 솔리스트로 진급한지 1년밖에 안 된 시점인지라 단장의 제안은 무척 조심스러웠다고 했다. 발레단을 이끌어가는 리더로서 조직의 분위기가 걱정됐지만 전준혁이 지난 시즌(지난해 하반기~올해 상반기) 보여준 기량과 춤에 대한 태도는 너무나 훌륭했기에 '하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전준혁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글로벌 발레 무대에서 역사를 써왔던 전준혁은 2014년 아시아인 최초로 영국 로열발레단 산하 발레학교의 커리큘럼에 대해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바 있다. 게다가 2017년 한국인 발레리노 최초로 발레단까지 들어갔다. 발레단 산하 교육생일지라도 졸업생 30명 중 1~2명만이 입단에 성공하는데, 그는 바늘 구멍을 두번이나 뚫었다. 하계 휴가를 맞아 잠시 한국을 찾은 그를 지난 2일 만났다.
지난달 <랩소디>의 주역을 맡아 무대위에 오른 전준혁 ⓒAndrej Uspenski
전준혁은 "퍼스트 솔리스트가 되기까지 수많은 기다림과 나를 연마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말했다. 빠른 진급과는 별개로, 입단후 7년동안 더 나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 매일같이 고민했다고. 퍼스트 솔리스트로 진급에 대해서도 주역을 안정적으로 맡을 수 있는 기쁨을 내세우기보다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했다. "이제 공연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비중있는 역'을 담당하게 될테니, 무대에 서는 횟수는 그만큼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털어놨다. 그에 따르면 '퍼스트 솔리스트'라는 직급은 단순히 테크닉만 뛰어나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전 씨는 "이 직급에 오른 무용수는 하나의 예술가로서 무용수 이름을 걸고 발레단을 대표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가져야 한다"며 "발레단 측에서 나를 든든한 발레리노로 인정한 거 같아 기쁘지만 그만큼 부담도 있다"고 했다.

너무 바빠서 슬럼프 따위는 겪을 일이 없었던 그였다. 그럼에도 전준혁은 지난 시즌 동안 본인이 생각하기에 좋은 배역을 맡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주역의 커버(대타) 역할로서 캐스팅이 돼 자신의 기량을 무대에서 보여줄 기회가 적었다는 것. 전 씨는 "너무 답답하던 중 프레드릭 애쉬튼이 안무한 <랩소디>에서 드디어 주역으로 무대에 설 기회를 잡았다"고 말했다. 이는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을 현대적인 발레안무로 재탄생 시킨 작품이다. 동료 무용수가 <랩소디>의 주역을 포기하면서 드라마처럼 그가 주인공으로 무대에 선다고 결정됐을 때 이미 그를 제외한 모든 주역들이 1~2주 앞서 맹연습을 하고 있었다. 첫 리허설도 '캐치업' 측면에서 참여했어야 했다. 오히려 이런 점이 그의 승부사적 기질을 불타오르게 했고, 그야말로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쏟아낼 수 있었다. "본 공연은 오랜 기간 저를 응원해준 객석의 팬들을 무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어요. 그 때의 기분은 뭐라 표현이 안 돼요."
영국 로열발레단이 새롭게 해석한 &lt;백조의 호수&gt;에서 '베노'역을 성공적으로 연기한 전준혁. ⓒAndrej Uspenski
입단 당시부터 기량은 이미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그에게 더 채워야 할 테크닉은 사실 없다. 다만 노련한 무용수일수록 배역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전씨는 "맞춤법을 틀리는 기자가 없는 것처럼, 테크닉이 부족한 로열발레단원은 없다"며 "배역을 받았을 때 저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많은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설정하고 저만의 스토리로 동작을 표현해 내 위장이나 거짓이 없게 한다"고 말했다. <백조의 호수>는 고전 발레지만 로열발레단이 재해석한 <백조의 호수>에서는 왕자의 친구인 '베노'가 매우 비중있는 역할로 나온다. 베노로 분한 그는 왕자에게 말을 거는 마임을 할 때도 마음속에서 구체적인 대사를 건네면서 했다고 했다.로열발레단의 경우 고전 발레도 잘 하지만 '드라마 발레'에 강점이 있다보니 캐릭터를 표현하는 무용수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를 연기하더라도 무용수마다 각기 다른 로미오가 돼야 한다"며 "예술가라면 고유의 예술성을 자신만의 배역 해석으로 표현해낼 줄 알아야 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는 이번 승급 소식을 개인 SNS에 한글 손편지로 정성껏 전했다. 5세 때 고모의 발레 학원에서 일찌감치 발레하는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한 그다운 방식이었다. 올 하반기에는 런던으로 돌아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비롯한 많은 현대작을 보여줄 계획이다. 캐스팅이 결정된 작품도 이번 승급으로 약간의 변동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내년 이맘 때는 로열발레단 동료들과 함께 한국을 찾아 갈라 공연을 열 계획이다.

롤 모델이 있을까? 한참을 골똘히 생각한 전준혁은 "롤 모델 같은 건 원래부터 없었고 누구를 나와 비교한 적도 없다. 나다운 무용수, 나다운 예술가로 거듭나는 길만 있을 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해원 기자

◈영국 로열발레단은...
1931년 영국 발레의 어머니 니네뜨 드 발루아가 세운 발레단이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과 함께 최고 지위를 수성하고 있다. 로열발레단 단원 등급은 아티스트부터 시작해, 퍼스트 아티스트, 솔리스트, 퍼스트 솔리스트, 수석 캐릭터 아티스트, 최고 단계인 수석무용수에 이르게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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