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슈퍼 엔저의 그늘

일본 엔화 가치가 곤두박질치면서 일본인들의 시름이 커지고 있다. 당장 수입 물가가 뛰어 고통받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보도에 따르면 미야기현 도미야시에서 초·중·고교생 5800명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한 급식센터는 최근 식단에서 소고기를 제외했다. 미국산 소고기 값이 1991년 수입 자유화 이후 최고 수준으로 뛰어 한 끼 300~360엔(약 2600~3100원) 정도의 예산으론 도저히 맞출 수 없어서다. 아사히신문은 미국 워싱턴DC의 한 연구기관에 파견 간 40대 남성의 가슴 찡한 사연을 전했다. 이 연구원은 신고 있던 아식스 운동화에 구멍이 생겨 새로 사려고 했더니 한 켤레에 60달러로 세금을 포함하면 1만엔에 이르는 것을 보고 구매를 포기했다. 일본에서 한 켤레에 5000엔에 산 기억 때문이다.

엔화 가치가 최근 달러당 160엔을 돌파하면서 1986년 말 이후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엔화는 1985년 플라자 합의 당시 달러당 250엔에서 1988년 120엔으로 뛰었으며, 2011년 75엔 이후론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올 들어 하락폭은 15%에 이른다. ‘슈퍼 엔저’는 정부에도 주름살을 드리우고 있다. 일본 정부는 스텔스 전투기 F-35A 구입 가격이 116억엔에서 140억엔으로 뛰어 스텔스 전투기 도입 대수를 줄여야 할 판이다.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이 늘어야 하지만 제조 수출기업 상당수가 외국으로 생산거점을 이전한 여파로 일본은 최근 5년간 무역·서비스 적자를 기록 중이다. 이 같은 부작용은 아베노믹스 때문이란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양적 완화, 재정지출 확대, 구조 개혁이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제시한 세 개의 화살인데 경제는 못 살리고 엔화 가치만 추락시켰다는 지적이다.

한국도 옆 동네 불구경만 할 처지는 아니다. 상반기 원화 가치가 7% 하락한 데 이어 달러당 1400원이 눈앞이다. 원화 가치가 더 떨어지면 농축산물, 에너지원, 산업용 소재와 장비 등의 수입에 부담이 커진다. 가까스로 잡히기 시작한 물가가 다시 뜀박질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1인당 25만원씩 풀자는 주장이 법안으로 추진된다니 답답하다. 가파른 통화 약세는 언제나 국민 삶의 질을 위협한다.

박준동 논설위원 jdpow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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