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신경 쓰지 마라, 나는 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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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23
초대형 '청량산 괘불탱' 속 부처님내가 근무하는 가나문화재단의 소장품 중에는 보물이 한 점 있다. 바로 ‘청량산 괘불탱’이다. 세로 9.5m, 가로 4.5m나 되는 거대한 크기의 비단에 화려하고 아름답고 위용이 넘치는 석가여래 부처님께서 온화한 표정으로 서 계시는 작품이다. 괘불은 불교에서 특별한 법회나 의식을 할 때 제작해서 걸어두는 대형 불화를 말한다. 괘불탱의 탱(幀)은 그림 족자라는 뜻이다. 대단한 크기 때문에 평상시엔 모든 시설을 잘 갖춘, 안전한 수장고 안 커다란 괘불궤 속에 말려(?) 계신다.
성가신 조사에도 인자한 미소만
이보름 가나문화재단·가나아트 기획총괄
‘청량산 괘불탱’은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됐던 작품이다. 언론에 공개하기 위해 날씨가 청청한 겨울날 잠시 야외에 걸려 있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때는 그냥 감탄만 하고 있었는데 이런 게 인연인지 이제는 그 부처님이 우리 수장고에 계시니 새삼 놀랍다.내가 이 작품과 관련해 잘못한 적이 있는데 짧게 요약해 보자면 ‘감히 짜증을 낸 죄’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젠 다들 잘 아시겠지만, 보물 국보 같은 국가유산(문화재의 새 이름)도 개인이나 사립 기관이 소유할 수 있다. 국가는 보관 환경이 쾌적한지, 각종 설비는 잘 돼 있는지, 실제 작품이 멀쩡한지, 몰래 다른 곳에 옮기지는 않았는지, 복원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등을 세세하게 살피는데 좀 성가실 때가 많다. 엊그제 한 것 같은데, 지난달에 한 것 같은데, 무슨 조사가 또 나오고, 또 나오고….
겁 없이 짜증부터 낸 이번의 일도, 결국 그런 성가심 때문이었다. 또 무슨 조사를 해야 한다고 공문이 왔기 때문이다. ‘저번에 했는데요?’라고 되물어 봐도 이전과 다른 목적의 것이란다. 국가유산청에서 지원하는 ‘정밀 조사’ 사업이라고 했다. 우리 수장고에 잘 모셔진 거대한 괘불을 어떤 장소로 옮겨 가서 다 펼친 다음 비단과 안료, 보관 상태를 상세히 조사해야 한다는 거다. 결과에 따라 복원이 필요하면 복원사업 예산이 편성될 거고, 보관 환경에 보완이 필요하면 그 예산이 편성될 수도 있다고 했다.
조사하는 건 좋은데, 그 큰 불화를 꺼내고 다시 넣을 일이 너무 고민이었다. 불화를 넣어두는 괘불궤만 해도 가로로 5m나 되니, 이걸 싣고 가려면, 또다시 들여오려면 대체 얼마만 한 차가 와야 하는 것이며, 수장고 코앞에는 큰 차를 댈 수 없으니 차가 들어올 수 있는 도로까지는 사람이 끌고 나와야 하는데, 그럼 몇 명의 인원이 필요한 것인가. 프라이빗 수장고라 외부 인원이 출입할 수 없으니, 일정 지점까지는 우리 직원들이 하고 또 그 지점부터 국가유산청 사업 조사팀이 투입될 수 있는 상황인데 등등의 이유로 짜증이 치밀었다.결론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길을 막았다고 거친 말로 항의하는 아저씨 몇 명의 고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작품은 잘 운반됐고, 잘 돌아왔다. 그날 밤 침대에서 ‘청량산 괘불탱’이 체육관 한가운데 펼쳐져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정밀 조사의 참관인 자격으로 그 모습을 봤다. 부처님은 평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눈물이 날 뻔했다. 병상에 누워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기분이랄까, ‘하나도 신경 쓰지 마라, 나는 잘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그 얼굴이 기억났다. 나는, 부처님을 위한답시고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행동을 한 거다.
내일모레는 또 어느 기관에서 국가유산 조사를 하러 나온다. ‘철조석가여래좌상’이 대상이다. 이번에는 곤두서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을 맞이할 거다. 꽃비로 촉촉해진 중생의 마음은 아직 평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