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살랑~' 저 여가수는 누구지?…"50대 아저씨도 반했다"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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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산호초'는 변한 게 없는데누구보다 트렌드에 민감해야할 언론인, 그것도 디지털 미디어의 뉴스국장로서 “함량미달” 소리 들어도 할 말 없게 됐다. ‘젊은 감각’ 익힌다고 수시로 들어가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일찌감치 눈에 들어온 ‘푸른 산호초’라는 단어를 별 생각 없이 넘겨버렸다.
뉴진스로 들썩이는 한일
지난달 도쿄돔 팬미팅서 멤버 하니
'쇼와' 상징 마츠다 세이코 노래 불러
일본 경제 최고 전성기 향수 자극
한국 일각 선 "K팝 스타가 日 노래?"
자존심 상처 일부 현지팬 평가절하
확 바뀐 양국 문화지형 속 잔잔한 파장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10일이나 지나서야 알게 됐다. K팝 아이돌 ‘뉴진스’의 멤버 하니가 지난달 26~27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팬미팅 ‘2024 버니즈 캠프’에서 일본 가수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青い珊瑚礁)를 리메이크해 일본이 뒤집어졌다… 대략 그런 얘기.
日 ‘버블시대’의 화신…마츠다 세이코
‘마츠다 세이코? 그 마츠다 세이코?’ 뉴진스 하니는 안중에 없고 마츠다 세이코에 먼저 반응한 걸 보니 ‘누가 1980년대 중·후반 친구들 눈치 보며 J팝에 빠져들었던 50대 아저씨 아니랄까봐’ 싶었다. 뒤늦게 유튜브에 조횟수 수백만회가 찍힌 동영상을 몇십 번이나 돌려보면서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영원의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에 관해 길게 얘기하고 싶진 않다. 세번의 결혼을 거치면서 양산된 수많은 루머와 스캔들을 이겨내고 1980년 데뷔부터 44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이돌로 불리는 명실상부한 슈퍼스타다.
푸른 산호초, 바람은 가을색(風は秋色), 맨발의 계절(裸足の季節), 여름의 문(夏の扉)… 2963만 장에 달하는 앨범 판매량, 1980년부터 88년까지 이어진 24곡 연속 오리콘차트 1위 같은 ‘숫자’들도 물론 대단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 만으로는 일본인들이 느끼는 감정을 설명할 수 없다. 그가 일본인들, 특히 50대 이상 중·장·노년층에게 특별한 건 전성기가 일본 최고 황금기였던 쇼와(昭和)시대(1926~1989년) 막바지와 정확히 겹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경제적 여유에 기반해 국민들의 콘텐츠 수요가 급증했다. 그 결과 애니메이션 등 일본의 대중문화는 1980년대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1990년대 들어 일본의 장기 경제불황이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이 누린 경제·문화적 풍요는 끝났다. 그나마 남은 추억의 중심이 세이코다. 뉴진스와 협업 경헙이 있는 일본의 팝아트 거장 무라카미 다카시(62)가 팬미팅 현장에서 이 노래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춘 게 화제가 됐다. 다카시의 이런 반응엔 다 이유가 있다.
한일 양국의 일부 날 선 반응들
하니의 푸른 산호초가 일본 내에서 정확히 어느 정도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잘 모르겠다. 현지 미디어들이 “노래가 끝난 후 암전돼도 도쿄돔은 충격의 여운이 계속되고 환희로 가득 찼다”(오리콘뉴스) “80년대 아이돌의 에너지가 지금 시대에 되살아난 것 같은 느낌.”(아사히 신문)이라는 등의 반응을 내놓기는 했다. 일본 특유의 비장한 표현들을 감안하더라도 이 무대가 양국에서 어느 정도 반향을 불러일으킨 건 맞는 듯 하다. 급기야 일본의 니혼TV가 6일 한 음악 방송에서 급하게 이 무대를 재연하기도 했다.(타국 미디어에 미안한 소리지만, 카메라 움직임, 무대 연출 등 모든 면에서 도쿄돔 열기의 100만 분의 1도 끌어내지 못 한 최악의 무대였다.)조회수 400만회를 돌파한 한 유튜브 클립에는 “그 시절 추억을 되살려줘 고맙다”는 일본의 4050팬, “마츠다 세이코라는 가수의 노래를 이번에 알게 돼 찾아들어봤다”는 한국의 1020팬들의 댓글이 뒤섞였다.
부정적인 반응들도 흥미롭다. 별일 없는 시기에 이런 이벤트를 기획했다고하더라도 민감한 한일관계를 감안하면, 가시 섞인 반응이 나왔을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지금은 ‘뉴진스맘’이라고 불리는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하이브와 소송을 불사한 희대의 일전을 벌이고 있는 시기다. 아니나 다를까. 민 대표에 감정이 안 좋은 한국의 ‘하이브 팬’들은 뉴진스가 일본을 상징하는 아티스트의 노래를 부른 데 대해 험담을 쏟아내고 있다. 일각에선 마츠다 세이코가 일본 내 주요 행사장에서 기마가요(きみがよ)를 부른 전력까지 문제 삼기도 한다. 일본에선 자신들도 잊고 지내던 명곡을 전 세계를 무대로 뛰는 K팝 스타가 멋지게 소환한 데 대해 “원곡을 실력도 없는 한국 아이돌이 망쳐놨다”는 식의 악평도 나온다.
예술가들에 관한 대중의 평판이 국제정치와 괴리될 수는 없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같은 위대한 음악가들조차 ‘친(親)나치’ 의혹으로 곤혹을 치러야했으니까.
그렇더라도 뉴진스는 막내 혜인이 2008년생 16살에 불과한 아이돌그룹이다. ‘일본 레전드의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삿대질 하는 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넘어 실소를 금치 못 할 일이다. 마츠다 세이코는 일제에 부역한 적도 없다. 그가 일본의 역사 교육을 비판하는 내용의 ‘피스와 하이라이트(ピースとハイライト)’로 오리콘 1위에 올랐던 사잔 올스타즈(サザンオールスターズ)의 구와타 케이스케 같은 역사의식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아쉬워하는 정도라면 모르겠다.
어디서 오는 여유로움인가
지금 한국의 1020세대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선진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 일원으로서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의 문화를 편견 없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쇼와시대 J팝 스타들은 한국의 어른 세대에겐 선진국의 ‘넘사벽’ 같은 존재였다. 그렇지만 처지가 180도 바뀐 지금 뉴진스에겐 그렇지 않다. 하니는 일본 대중음악의 찬란한 유산을 어떤 자격지심도 없이 여유 철철 넘치게 소화했다. 푸른 산호초는 변한 게 없는데, 두 나라 문화지형은 이렇게 바뀌었다. 하니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시끄러운 건 ‘콤플렉스 덩어리’들 뿐이다.
송종현 한경닷컴 뉴스국장 scre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