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화재, 교통사고…'팝아트의 전설'은 세 번의 위기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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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화미술관 제임스 로젠퀴스트 회고전 '유니버스'앤디 워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팝아트의 거장'. 대중매체에서 빌려온 이미지로 날 선 질문을 던지는 '시각적인 시인'. 뉴욕의 옥외 광고 업계를 주름잡고, 카셀 도큐멘타 6(1977)과 베네치아 비엔날레(1978) 등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은 제임스 로젠퀴스트(1933~2017)의 여러 수식어 중 일부다.명성과 별개로, 그동안 그의 작품이 한국에 소개된 경우는 드물었다. 1989년 단체전과 1995년 개인전이 전부였다. 길게는 수십m에 달하는 작품 크기가 한몫했다. 서울 새문안로 세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는 넉넉한 공간에서 그의 대표작 29점과 아카이브 자료 39점을 만날 기회다.거대한 규모와 추상적 상징으로 특징되는 그의 작품에는 굴곡진 인생사가 투영됐다. 잘 나가는 광고 화가로 출발해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눈을 감기까지, 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추락과 교통사고, 그리고 화재'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하늘 가까이 살던 소년, 동료의 추락을 지켜보다
뉴욕의 광고판 화가가 '팝아트 거장'이 되기까지
작가는 1933년 미국 노스다코타의 대평원에서 태어났다. 항공기 정비공이었던 아버지와 파일럿 어머니의 영향으로 8세부터 모형 항공기를 만들며 놀았다. 하늘과 가까이 살아온 유년기의 기억은 훗날 '시간 먼지-블랙홀'(1992) 등 우주를 연상케 하는 작업으로도 이어졌다.뉴욕으로 미술 유학을 떠났지만, 넉넉지 않은 형편 탓에 1년 만에 학업을 포기했다. 운전기사와 바텐더를 전전하다가 뉴욕의 네온사인 제작회사인 아트크래프트 슈트라우스에 들어갔다. 20대 초반부터 비계에 매달린 채 타임스퀘어의 옥외 광고를 그리기 시작했다.상업 화가로서 입지를 다지던 그는 생애 첫 번째 변곡점을 맞이했다. 1960년 건물 외벽에서 작업하던 동료 두 명이 추락해 사망한 것이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튜디오 작가로 전향했다. 광고 사진처럼 세밀한 묘사력과 거대한 스케일을 동시에 갖춘 작품들을 그리게 된 배경이다.
아내와 아들한테 닥친 교통사고
전시 도입부의 '데일리 초상화'(1968)는 당시 시카고 시장이었던 리처드 데일리를 폴리에스테르 필름 위에 그린 작품이다. 세로로 길게 자른 필름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흩날린다.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를 비판했던 데일리를 날려버리고 싶다는 작가의 마음이 투영됐다.이처럼 작가는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작품에 녹여냈다. 미래세대를 향한 고민은 1971년 작가의 아내와 아들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으면서 한층 깊어졌다. '마음, 포인터, 가슴 체온의 사이에'(1982) 등에서 등장하는 흰 티셔츠는 뇌 손상으로 쓰러진 아들을 상징하는 매개체다.
1990년대 '인형' 연작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에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 창궐했을 당시, 무시무시한 질병에 맞서 살아갈 어린 딸을 걱정하며 제작한 작품이다. 인형을 둘러싼 반짝이는 비닐은 아이를 보호함과 동시에 질식시키는 듯한 이미지를 연출한다.모든 걸 앗아간 말년의 화재
사고는 작가의 말년까지 끊기지 않았다. 2009년에 플로리다에서 발생한 산불로 62에이커(약 8만4000평)에 이르는 그의 땅과 집, 스튜디오가 불에 탔다. 작가 모친의 유품을 비롯해 상당수의 작품이 이때 유실됐다.가로 6.1m 세로 2.74m에 이르는 '우주를 응시하는 부유한 사람'(2011)이 후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전까지의 섬세한 기교 대신 감정에 충실한 붓 터치가 눈길을 끈다. 군데군데 물감이 튀고, 덜 섞인 물감을 거칠게 바른 모습이다. 캔버스 좌측에 그린 자동차 휠은 불타 없어진 작가의 '애마'를 상징한다.
전시는 작가의 유작으로 알려진 '본질적 존재'(2015)로 마무리된다. 화면 가운데 관객을 비추는 거울을 중심으로 펼쳐진 유리 파편은 각각 하나의 멀티버스를 상징한다. 곧 자신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한 걸까. 어린 시절 하늘을 동경했던 작가는 2017년 먼 우주로 떠났다.
전시는 9월 29일까지.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