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 땅 판 돈으로 국고채 사세요"…'인공지능 PB'가 수십억 투자 제안

재테크 판이 바뀐다
(4)디지털이 바꾼 자산관리 트렌드

고액 자산가 비대면 거래 급증
스마트폰으로 디지털 PB 상담
月 1000억원씩 비대면 거래도

고객 투자성향 3초면 분석 끝
AI가 부자들 맞춤상품 띄우면
디지털 PB "월배당 ETF 추천"
사진=게티이미지뱅크
40대 A씨는 투자해둔 20억원어치 채권의 만기가 돌아오자 스마트폰을 켰다. 삼성증권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에 접속해 디지털 프라이빗뱅커(PB)와 상담하기 위해서다. 디지털 PB가 이 고객을 응대하는 동안 한쪽에선 인공지능(AI) 시스템이 이 고객이 반복 언급한 상품군과 최근 거래 내용을 분석해 성향에 맞는 유망상품을 뽑아냈다. 이 PB는 그에 맞춰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파킹형·월배당형 상장지수펀드(ETF)를 고객에게 추천했다. 결국 이 고객은 지점 방문 한 번 없이 온라인을 통해 20억원을 재투자했다.

자산관리(WM) 시장에서 고액 자산가들의 디지털 거래가 활성화하고 있다. 증권가 큰손으로 떠오른 이들 ‘디지털 VIP’는 스마트폰에 익숙하고 SNS와 유튜브 채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투자 정보를 취합한다. 증권사들도 각종 비대면 서비스와 AI 기술 도입에 사활을 걸고 있다.

10억원 거래도 ‘덜컥’…디지털 VIP의 힘

9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NH투자증권의 디지털 자산가 관리 서비스 ‘디지털케어 플러스’(투자 자산 1억원 이상)의 고객 수는 지난해 말 1만4567명에서 최근 1만8865명으로 증가했다. 신한투자증권(myPB 프리미엄 멤버스·3억원 이상)은 지난 3월 출범 후 3개월 만에 회원이 4200명을 돌파했고, 삼성증권(S라운지 VIP·10억원 이상)도 얼마 전 3000명 문턱을 넘겼다. 삼성증권은 100억원 이상 디지털 VIP 고객도 100명 이상을 확보했다.

증권사 디지털 VIP는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거래가 활성화하면서 급증했다. 비대면이라고 하더라도 대접은 오프라인 점포 못지않다. 실시간 기관·외국인 매수세와 종목별 투자정보 제공, 온라인 세미나 및 비대면 컨설팅 등은 기본이다. 여기에 증권사들은 세무 처리, 골프 레슨, 명품 기프트 등을 동원하며 디지털 VIP 마음을 사로잡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면으로 유대를 쌓는 구조가 아닌 만큼 언제 어떤 형태의 큰 거래가 터져나올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봉기 NH투자증권 디지털고객관리본부 대표는 “최근 디지털케어 플러스 비대면 컨설팅을 20차례 받은 한 60대 개인 고객이 문중 자산 10억원어치를 꺼내 들어 국고채를 매수하기도 했다”며 “눈에 보이는 MTS 잔액만으로 이들의 상품 구매력을 오판하지 않는 것이 디지털 VIP를 대하는 첫 번째 자세”라고 말했다.

AI, 고객 ‘속마음’ 3초 만에 파악

디지털 PB의 역할도 중요해졌다. 비대면 고객이 원할 시 언제든 각종 문의를 처리하는 이들은 각사 디지털 자산가 관리 서비스의 핵심이다. 이들은 성과지표(KPI)마저 일선 점포 PB와 다르다. 거래 따내기가 아니라 평소의 고객 만족도에 초점을 맞춘다. 현재 삼성증권(100명), NH투자증권(90명)을 필두로 미래에셋증권, KB증권, 신한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등이 20~50명의 인력을 운용하고 있다.

이찬우 삼성증권 디지털부문장은 “비대면으로 월평균 1000억원을 거래하는 ‘디지털 VVIP’까지 등장하면서 디지털 PB 인력 확충과 전문성 확보는 필수가 됐다”며 “디지털 자산가의 수요를 파악해 MTS 개선에 참고하거나 가상자산 세무 상담을 하는 일까지 디지털 PB가 도맡고 있다”고 말했다.

AI 기술도 디지털 VIP를 공략할 첨병으로 떠올랐다. 우선적인 활용처는 디지털 PB가 모인 디지털 센터다. 비대면 일상화로 성향 파악이 어려워진 만큼 데이터와 AI를 바탕으로 고객 속마음을 공략하는 것이다. ‘STT(speech to text)’ 기술을 통해 전화 통화 내용을 텍스트로 치환하고 AI에 학습시킨다. 고객이 타깃데이트펀드(TDF)를 반복 언급하면 최근 MTS의 거래·검색 내용과 대조해 투자 성향에 맞는 상품을 찾아내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AI는 디지털 PB에게 자동으로 어려운 용어를 검색해주거나, 고객이 원하는 의도를 파악해 답변해야 할 키워드를 3초 이내에 미리 띄워주기도 한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