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에 뺏길 수 없죠"…'한글 독립' 꿈꾸는 '산돌'의 도전 [원종환의 뉴트로中企]

윤영호 산돌 대표 인터뷰

1980년대 '한글 독립' 꿈꾸며 만들어진 폰트회사 산돌
MS, 삼성, 애플 등의 전용 폰트 제작

2018년 윤 대표 합류 이후 '클라우드 서비스' 본격화
"故 석금호 의장의 '한글 사랑' 정신 이어갈 것"
12일 서울 성수동에 있는 산돌 본사에서 만난 윤영호 대표. 사진=원종환 기자
"한글 폰트(글꼴)를 노리는 외국기업에 맞서 한글의 멋과 미(美)를 지키는 기업이 되겠습니다."

국내 대표 폰트회사인 산돌의 윤영호 대표는 12일 한국경제신문과 만나 "일본이 만든 한글 글꼴을 쓰던 시절 '한글 독립을 해내겠다'는 일념으로 회사를 세운 석금호 의장님의 정신을 잇겠다"며 이같이 말했다.산돌은 지난 5월 석 의장이 급작스레 별세하며 위기를 맞았다. 윤 대표는 "재무적인 이익보다도 사회적 가치를 만드는 기업을 만들고 싶어 2018년 산돌에 합류했다"며 "우리 한글을 잘 가꿔나가고 임직원들이 행복한 회사를 만들어달라는 석 의장님의 당부를 지키고 싶다"고 밝혔다.

지난달에는 국내 폰트회사 윤디자인그룹을 인수하며 업계에서 입지를 강화했다. 윤 대표는 "글로벌 폰트기업이 국내로 진출하기 위해 윤디자인그룹을 인수 직전까지 몰고 갔다"며 "글로벌 폰트기 일본 2위 폰트회사를 인수하자 시장 전체가 흔들리는 것을 답습하고 싶지 않아 내린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글로벌 폰트 회사들은 지금도 국내 글꼴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며 "국내 폰트회사 1위로 발돋움한 산돌이 업계가 더불어 성장하는 상생의 장을 만들어가겠다”고 강조했다.

'한글 독립' 위해 시작한 산돌

산돌은 석 의장의 남다른 ‘한글 사랑’으로 만들어진 회사다. 1978년 한 잡지사에 디자이너로 입사한 그는 당시 인쇄 기계와 폰트를 모두 일본에서 들여 와 사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한국은 독립했지만, 한글은 독립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석 의장은 1984년 당시 27세 나이로 잡지사를 박차고 나와 산돌을 세운다. 예수의 별명이기도 한 회사명은 한글이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녔다는 점에 착안했다. 서울 명륜동에 있는 연면적 60평의 가정집에서 산돌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석 의장의 포부와 달리 회사는 초창기부터 경영난에 직면한다. 일감이 들어오지 않아 하루 세끼를 라면으로 연명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의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컴퓨터가 국내에 도입되며 디지털 한글 폰트의 중요도가 커지면서다.
사진=산돌
그는 잡지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정교한 퀄리티의 폰트를 개발하는 데 힘쓴다. 1988년 금성사(현 LG전자)의 '하나워드' 화면용 서체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마이크로소프트(MS), 삼성, 애플, 구글 등 국내외 대기업들의 전용 한글 폰트를 만들며 사세를 키워나갔다.

윤 대표는 “MS의 맑은 고딕을 비롯해 애플의 본고딕, 네이버의 나눔고딕 등 석 의장님이 직접 개발한 폰트가 알려지며 회사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잡혔다"며 "수집하신 한글 타자기의 규모가 대형 컨테이너 한 박스로 부족할 정도로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던 분"이라고 회상했다.

클라우드 서비스 '산돌구름'으로 사세 확장

산돌은 전문 경영인 출신인 윤 대표가 2018년 합류하며 전환기를 맞는다. 그가 석 의장이 설립한 비영리 단체 '타이니씨드'에서 봉사활동을 한 게 우연한 계기였다.윤 대표는 "업계가 어려워지자 석 의장님이 회사 매각을 부탁했다"며 "일주일 뒤 '내가 직접 산돌을 이끌어보겠다'고 말하자 석 의장님이 고민 끝에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새 사령탑에 오른 윤 대표는 앞서 2014년 국내 최초로 출시된 구독형 폰트 클라우드 서비스 '산돌구름'을 개방형 폰트 플랫폼 서비스로 확대한다. 그는 “경쟁사를 인수합병(M&A)해 성장하는 방식보다는 시장의 파이를 키워 상생하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며 "총대를 메고 폰트회사들을 일일이 찾아가 클라우드 서비스 입점을 설득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저작권 시비에서 자유롭게 폰트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산돌은 2020년 폰트를 사용범위에 따라 달리 사용해야 하는 라이선스 제도를 없앤다. 윤 대표는 "경쟁사들과는 달리 고객과 싸우지 않고 폰트를 널리 알리는 방향을 택했다"며 "고퀄리티 폰트를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산돌구름을 구독한 고객이 꾸준히 늘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산돌은 현재 폰트업계 시장점유율(매출 기준)이 약 80%에 달하는 업계 1위 회사로 성장한다. 산돌구름을 이용한 누적 회원 수는 156만 명에 달한다. 현재 60여개에 달하는 폰트회사가 산돌구름에 입점해 있다. 총 46개 언어로 제공하는 폰트의 수는 2만 4000개를 넘는다.

모바일 폰트로 신사업 나서

사진=산돌
엔터테인먼트 모바일 폰트 시장은 산돌이 주목하고 있는 또 다른 '먹거리' 산업이다. 이 폰트는 프레젠테이션(PPT)이나 디자인 등에 쓰이는 전문적인 폰트와는 달리 스마트폰에서 간단히 활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윤 대표는 “엔터테인먼트 모바일 폰트에서 지난해 10억을 기록한 이래 성장률이 크게 늘고 있다"며 "새로운 폰트를 꾸준히 출시하며 모바일 폰트 시장을 공략하는 게 글로벌 폰트회사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더 최적화된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자회사와의 협업도 이어가고 있다. 윤 대표는 “양질의 폰트를 디자인하는 만큼 플랫폼을 운영하기 위한 정보기술(IT)도 중요하다고 느꼈다"며 2021년 산돌메타랩을 만든 이유"라고 설명했다.

인쇄된 폰트를 촬영하면 어떠한 폰트인지 설명해 주는 산돌구름의 'AI 서비스'가 이를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산돌메타랩은 지난해 5월 스톡이미지 서비스를 운영하는 비비트리를 인수하기도 했다. 폰트와 함께 쓰이는 최적화된 이미지를 제공해 소비자의 편의성을 끌어올리겠다는 윤 대표의 구상이다.윤 대표는 "사회적 자산이기도 한 우리 한글로 회사를 꾸린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며 "경영승계 등의 문제로 회사가 흔들리거나 해외에 매각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원종환 기자 won040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