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주말에 비가 또 온다는데…" 복구도 마음도 막막한 이재민

"큰맘 먹고 산 농기계 침수…밭도 다 물에 잠겨 올해 농사는 망쳐"
집 가보려는 고령 노인들 충격받을까봐 말리기도
"주말에 또 비가 온다는 데 마음이 그냥 착잡해서 나와봤어요. "
11일 오전 대전 서구 용촌동 정뱅이마을 초입에서 만난 노인회장 김갑중(73)씨는 수마가 할퀴고 간 마을을 바라보며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김씨는 "지긋지긋한 장마가 언제 끝날지 걱정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벌곡천 바로 옆 저지대에 들어선 마을에는 전날 새벽 제방이 무너지며 지붕까지 물이 차올랐다. 정뱅이마을 전체가 침수되면서 27개 가구 주민 36명이 고립됐다가 구조됐다.

물이 빠진 뒤 주민들의 보금자리는 온통 '뻘밭'으로 변해버렸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끈적한 진흙이 들러붙어 걸음을 떼기가 힘들 정도였다. 무너진 제방 위로는 포크레인 장비 3대가 동원돼 임시로 흙을 채워 넣고 있었다.
마을 곳곳에서는 진흙으로 덮인 도로를 복구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었으나, 이재민이 된 주민들은 막막하기만 하다.

당장 주말에도 비가 예보돼 있는데 장마도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농사짓고 소도 키우는 채홍종(63)씨는 "빚내서 최근에 큰맘 먹고 산 농기계가 침수됐고, 밭도 다 물에 잠겨서 올해 농사를 망쳤다"면서 "물이 들어차서 놀란 소가 산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다시 데리러 오느라 진땀뺐는데, 또 비가 더 오면 다시 침수될까 봐 정말 걱정"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재민 대피소에 있다가 집을 찾아온 김용태(59)씨는 벽 한쪽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만 연신 어루만졌다.

'물이 여기까지 들어찼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가족사진 위쪽을 가리킨 그는 "아이고, 우리 엄마 수영하셨겠네"라며 집기류가 나뒹구는 집안을 허탈하게 쳐다봤다.
진흙투성이에 난장판이 된 김씨의 보금자리는 전날 새벽에 들이닥친 수마의 위력을 가늠케 했다.

입구부터 진흙이 묻은 온갖 가재도구가 널브러져 있고, 냉장고와 의자, 책상, 침대가 뒤엉켜있었다.

김씨는 "뭐라도 좀 건질 수 있는 게 있나 싶어서 와봤는데 정말 하나도 없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대피소에 있는 주민 중 일부는 물이 빠진 마을에 들러 집에서 일부 짐을 챙겨가기도 했다.

가족만큼 가까운 사이였던 마을 주민들은 집에 가보려는 고령의 노인들이 충격을 받을까 봐 말리기도 했다.

키만큼 들어찬 물속에서 구사일생한 문옥남(84)씨는 "다른 이웃들이 집에 간다고 하길래 같이 가려고 했더니, 이웃들이 내가 충격받을 거라면서 (집을) 안 보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리더라"고 전했다.
아들 덕분에 문씨와 함께 가까스로 구조된 권주옥(87)씨도 "22살에 시집와서 계속 살았던 종갓집이고 엊그제까지만 해도 친척들이 오갔던 곳인데, 이제 그 터전이 사라진 것"이라며 "오늘도 날씨를 보아하니 조만간 비가 또 올 것 같은데 그날(전날)처럼 비 오면 또 넘치겠지"라며 힘 없이 말했다.

대피소에 누워있던 정병원(87)씨도 "당연히 집에 가고 싶죠. 내 평생 살아온 고향인데. 그래도 어째요.

비가 계속 온다는데 기약 없고 막막하지만 여기 있어야죠"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정뱅이마을 이재민들은 기성종합복지관에 마련된 대피소에 머물고 있다.

전날 대전 지역에 내린 폭우로 정뱅이마을 주민을 포함해 이재민 73명이 발생했고 이들은 기성종합복지관과 가수원장터 경로당으로 대피했다. 서구 관계자는 "오는 14일까지 무너진 제방에 톤 마대(1㎏ 상당의 흙 주머니)를 쌓아서 임시 복구를 할 예정이고, 추후에는 대전시와 협의해서 복구 작업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