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재일 기업인' 서갑호의 애국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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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대사관저를 ‘동명재(東鳴齋)’로 이름 짓는 현판식이 있었다. ‘동명’은 60여 년 전 한국대사관 부지 기증자이자 해외 동포 최초의 한국 투자자인 고(故) 서갑호 방림방적 회장의 아호다.
6·25전쟁 와중인 1952년, 주일 한국대표부는 도쿄의 한 작은 빌딩에 세 들어 있었으나, 임차료를 못 내 쫓겨날 판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재산 몰수 방침을 내세워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의 저택을 돌려받아 쓰라고 지시했으나, 이은이 “일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았다”며 거부해 갈 곳이 없었다. 국가적 망신살이 뻗칠 일을 해결해준 사람이 서 회장이다. ‘오사카 방적왕’으로 불릴 정도로 부를 일궜던 그는 당시 덴마크 공사관이 입주한 건물을 매입해 우리 대표부에 무상으로 쓰게 하더니,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인 1962년 8월 15일 광복절에 한국 정부에 아예 기증했다.서 회장은 롯데 창업자 신격호 회장의 옆동네인 경남 울주군 삼남면 출신(1915년)이다. 14세 때 ‘단신 도일’해 베 짜는 기술을 익힌 뒤 온갖 거친 일을 하며 재산을 모아 방적공장 몇 곳을 설립·인수해 1950년대 일본 최고 갑부 반열에 올랐다. 1950년도 소득이 오사카 1위, 일본 전체에서도 10위 내로 동포 사회에서 ‘관동의 신격호, 관서의 서갑호’로 통했다.
1963년 영등포에 14만 추의 방림방적을 설립하면서 이 땅의 방적산업 부흥에 한 축을 맡았다. 그의 고국 사랑은 오사카의 총영사관·한국학교·민단 운영 후원, 산업체 부설 학교 동명상고 설립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 기업가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애국 스토리는 여기까지다. 한국 제2공장인 구미 윤성방직의 대형 화재(1974년)와 일본 내 경영난까지 겹쳐 부도난 뒤 1976년 61세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 정부는 오일쇼크를 핑계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그를 외면했다. 그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은 훈장 몇 개와 일본 대사관 내 아호와 흉상, 그의 후원금으로 세워진 인천 수봉공원 내 재일학도의용병 6·25참전기념비의 이름 정도뿐이다. 그는 “조국이 부끄러우면 안 된다”며 기부를 아끼지 않았으나, 우리는 그를 부끄럽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
6·25전쟁 와중인 1952년, 주일 한국대표부는 도쿄의 한 작은 빌딩에 세 들어 있었으나, 임차료를 못 내 쫓겨날 판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재산 몰수 방침을 내세워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의 저택을 돌려받아 쓰라고 지시했으나, 이은이 “일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았다”며 거부해 갈 곳이 없었다. 국가적 망신살이 뻗칠 일을 해결해준 사람이 서 회장이다. ‘오사카 방적왕’으로 불릴 정도로 부를 일궜던 그는 당시 덴마크 공사관이 입주한 건물을 매입해 우리 대표부에 무상으로 쓰게 하더니,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인 1962년 8월 15일 광복절에 한국 정부에 아예 기증했다.서 회장은 롯데 창업자 신격호 회장의 옆동네인 경남 울주군 삼남면 출신(1915년)이다. 14세 때 ‘단신 도일’해 베 짜는 기술을 익힌 뒤 온갖 거친 일을 하며 재산을 모아 방적공장 몇 곳을 설립·인수해 1950년대 일본 최고 갑부 반열에 올랐다. 1950년도 소득이 오사카 1위, 일본 전체에서도 10위 내로 동포 사회에서 ‘관동의 신격호, 관서의 서갑호’로 통했다.
1963년 영등포에 14만 추의 방림방적을 설립하면서 이 땅의 방적산업 부흥에 한 축을 맡았다. 그의 고국 사랑은 오사카의 총영사관·한국학교·민단 운영 후원, 산업체 부설 학교 동명상고 설립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 기업가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애국 스토리는 여기까지다. 한국 제2공장인 구미 윤성방직의 대형 화재(1974년)와 일본 내 경영난까지 겹쳐 부도난 뒤 1976년 61세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 정부는 오일쇼크를 핑계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그를 외면했다. 그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은 훈장 몇 개와 일본 대사관 내 아호와 흉상, 그의 후원금으로 세워진 인천 수봉공원 내 재일학도의용병 6·25참전기념비의 이름 정도뿐이다. 그는 “조국이 부끄러우면 안 된다”며 기부를 아끼지 않았으나, 우리는 그를 부끄럽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