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청소부로 일할 적의 행복한 기억을 소환해 준 '퍼펙트 데이즈'

[arte] 유창선의 오십부터 예술

영화 '퍼펙트 데이즈' 리뷰

'완벽한 날'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매일 똑같은 일상의 소중함
요즘 중장년층의 조용한 소문을 타고 있는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 하지만 재미있다고 누구에게 추천했다가는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을지 조심스럽다. 상영 2시간 동안 아무런 사건도 서사도 없다. 그저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루틴한 일상이 스케치처럼 그려질 뿐이다. “2시간 동안 남이 화장실 청소하는걸 돈 내고 봐야 하나”라던 관람평을 접한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매일 똑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도쿄의 공중화장실 청소원으로 일하는 히라야마는 아침에 일어나면 세안과 면도를 하고 청소 작업복으로 갈아입고는 자판기에서 캔 커피 하나를 뽑아서 소형차를 운전하여 일터로 향하는 모습이 반복된다. 히라야마가 화장실을 청소하는 장면을 카메라는 세밀하게 비추는데, 청소도구가 아니라 직접 손으로 일일이 변기를 닦는 그의 모습에서 자기 일에 대한 진지함과 성실성을 느끼게 된다. ▶▶▶(관련 리뷰) 일상 속에서 빛나는 생의 찬미,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
▶▶▶(관련 칼럼) 도쿄 공중화장실 청소부가 빛내준 '어느 멋진 날, 완벽한 순간'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영화에 나오는 히라야마의 하루하루는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다. 점심에는 공원에 있는 나무숲 벤치에서 샌드위치나 우유를 먹고,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낡은 카메라로 찍는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은 현상을 해서 집 서랍 속의 상자에 차곡차곡 보관된다. 퇴근 후에는 대중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작은 선술집에 들어가 레몬 소주를 즐긴다. 밤이면 중고 서점에서 사다 놓은 책들을 읽다가 잠이 들곤 한다.

그런 일상을 반복하는 히라야마의 얼굴은 언제나 밝게 미소 짓고 있다. 장년의 나이에 화장실 청소일을 하고 독거생활을 해야 하는 고달픔이나 외로움 같은 표정은 얼굴에서 읽을 수가 없다. 외로움을 탈 여러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루틴한 일상 속에서 그는 행복한 마음을 얻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프랑스 철학자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루틴한 생활의 필요성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휴식 중인 것은 아니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건이 잿빛 일상에서 확 떠오르려면 백색의 시간, 별일 없이 살아가는 중립의 지속이 필요하다. 허를 찌르는 순간은 거의 항상 자잘한 소음을 배경으로 삼는다. 단조로운 일상이 없으면 전격적인 변화도 가능하지 않다. 우리 일상의 선율은 일종의 통주저음(通奏低音)이다. 그 통주저음을 배경 삼아 이따금 가슴 떨리는 아리아가 연주된다.”(<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시시한 것의 찬란함’을 강조한 그가 내린 결론은 “내 인생은 이런저런 반복들이다”라는 제노의 말이었다. 애당초 인생의 축복은 그렇게 화려한 무대 위에서 내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무대 위에서 내려와 이제는 관객 없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내게 맞는 인생의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임을 히라야마의 웃음 띤 얼굴을 통해 알 수 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하지만 그런 히라야마에게도 과거의 아픈 사연이 있음을 영화는 스쳐가듯 알려준다. 엄마와 싸우고 가출하여 삼촌 집에 찾아와 지내던 여조카 니코를 히라야마의 여동생이 데려가던 날, 히라야마는 처음으로 슬프게 흐느낀다. 히라야마는 니코에게 "이 세상은 수많은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어, 연결된 세상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세상도 있지, 니코의 엄마와 나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어"라고 말했었다. 니코의 엄마도 평소 “삼촌은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말해오곤 했다.히라야마는 화장실 청소원 일을 하며 허름한 골목집에 살고 있지만, 여동생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그의 입 앞에 나타난다. 오빠는 가난하고 여동생은 풍요롭게 살면서 서로 연락조차 없이 살고 있다. 그것이 어떤 색깔이든,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있는 것이다. 무슨 사연인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지만, 아마도 서로 화해하기 어려운 갈등을 빚고 소원해진 역사를 가진 남매임을 짐작하게 한다. 히라야마가 그 나이에 혼자 사는 가족사의 아픈 사연이 궁금해지지만, 영화는 그것을 설명하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다. 보여주되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궁금해할 것들조차 설명하지 않는 대단히 불친절한 영화다. 관객들이 알아서 느끼고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오히려 관객의 역할이 커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올린 후기들을 여럿 접했다. 하나같이 말하는 것이 ‘일상의 소중함’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반복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히라야마의 모습에서 떠올리는 말이다. 너무 당연한 유행어처럼 말들 하니까 구호 같은 느낌도 들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히라야마에게 감정이입 될 수 있는 짧지 않은 기간이 있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일상의 소중함’은 일상을 송두리째 박탈당한 사람에게는 관념이 아니라 간절히 되찾고 싶은 염원이 된다. 히라야마처럼 화장실 청소를 맡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도 동네 청소 근로를 하던 시간이 있었다. 5년여전 뇌종양 수술을 하고는 온갖 후유증 때문에 8개월 동안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혀는 마비되었고 식도는 열리지 않아 회복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피가 뇌로 제때 가지 못해 걸핏하면 실신했다. 병원에만 갇혀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했던 그 시간 동안 입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던가를 몸으로 깨달았다. 서서 버티는 훈련을 계속한 끝에 세면대 앞에 자기 두 발로 서서 양치질하는 모습을 거울로 보면서 감격했던 날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몸이 조금 회복되어 근처 공원에 갔을 땐 영화 속 히라야마가 나무들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을 보며 미소 짓듯이, 나는 파란 하늘을 보고 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났음에 기뻐했다. 이 생명의 소리를 들으려고 그렇게 버티며 살아남았구나.

8개월 만에 병원에서 나와 재활 운동을 하던 무렵에 하게 된 것이 ‘코로나 방역 근로’였다. 주민센터에서 모집하길래 신청해서 매일 출퇴근하며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청소와 방역 근로를 했다. 탄천의 정비를 함께하기도 했고 가을에는 낙엽을 쓸어모아 부대 자루에 넣었다. 아직 몸은 성치 않았지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던 내가 출퇴근하며, 동네를 돌아다니며, 빗자루질하고 담배꽁초를 줍는 루틴한 생활을 할 수 있음이 너무도 기쁘고 행복했다.

한 달이 지나 첫 월급명세서를 받았을 때 내가 이제는 사람으로서의 제 구실을 하고 있구나 하는 기쁨이 솟아났다. 청소 일을 하면서 루틴한 일상을 누리던 행복감은 어쩌면 히라야마 보다 당시의 내가 더 컸을 것만 같다. 그래서 흔한 구호처럼 쓰이는 ‘일상의 소중함’이라는 말이 내게는 몸으로 깨달은 생생한 진리로 남아있다. 아직도 완전하지는 않은 몸이지만 이렇게 글까지 쓰며 하루하루를 감사히 살고 있는 밑바닥에 그런 사연이 있다. 그러니 히라야마가 짓곤 하는 미소의 의미가 더욱이 와닿았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물론 영화뿐이 아니라 모든 예술이 그러하다. 음악평론가 스티븐 존슨은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내 정신을 바꾸었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길고 긴 고립의 한 가운데에 빠져 있었던 나에게 쇼스타코비치는 내가 완전한 혼자가 아님을, 내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누군가도 알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또한 어떤 신비한 차원에서 쇼스타코비치도 나를 '들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님을, 음악은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퍼펙트 데이즈> 또한 그런 영화였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코모레비’라는 말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이라는 뜻의 일본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히라야마의 눈에 비치는 햇살은 그날그날 달라 보인다. 햇살조차 오직 한번,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 매일 똑같아 보이는 일상도 사실은 다른 순간들이며 매 순간이 소중함을 영화는 일깨워준다. 일상을 루틴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정체되고 멎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히라야마와 니코가 주고받는 대사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나중은 나중이고, 지금은 지금이야.” 지금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중요하게 여기는 히라야마의 마음이 드러난다. 매일 똑같은 날을 살아가는 사람도 하루하루가 같을 수는 없다. 루틴한 일상 너머로 새로운 것에 대한 꿈이 살아있기에 지금에 충실하면서도 나중의 변화를 기약할 수 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영화의 마지막. 히라야마는 운전을 하면서 웃는다. 하지만 웃음은 이내 울 것 같은 얼굴로 바뀐다. 울듯이 웃고, 웃듯이 우는 히라야마의 마지막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소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감, 그러나 심연에 깔린 삶의 슬픈 회한은 그렇게 복잡하게 뒤섞여서 관객들 앞에 나타난다. 우리에게 ‘완벽한 날’(Perfect Days)이란 과연 존재할까. 어쩌면 무엇이든 결핍된 지금의 삶을 ‘완벽한 날’에 대한 꿈이 지탱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관조하던 관객들과 히라야마 사이에 유지되던 거리감은 행복과 회한의 감정이 뒤섞인 마지막 표정에서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우리들이 살아온 삶도 그러지 않았던가.영화에는 1960~70년대 시절의 명품 곡들이 흐르면서 분위기를 더해준다. 장년층의 추억에 남아있는 애니멀스의 '더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The House of The Rising Sun)은 두 번 나온다. 그 가운데 선술집 여주인으로 나오는 이시카와 사유리가 부르는 일본 버전이 유난히도 구슬프게 들린다. 엔딩에서 흘러나오는 니나 시몬느의 ‘필링 굿’(Feeling Good)에 나오는 'It's a new dawn, It's a new day, It's a new life for me, I'm feeling good'이라는 가사가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을 마지막으로 전해준다. 보고 나서 돌아오는 길, 오늘 이렇게라도 살아가고 있음이 소중하고 감사함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이다.

유창선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