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의 김은선과 '변칙'의 스티븐 허프가 빚어낸 라흐마니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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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선X서울시향, 7월 10·11일 롯데콘서트홀서 호흡지난 6월 영국의 저명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가 운영하는 클래식 음악계 뉴스 사이트 ‘슬립트 디스크’가 우리의 눈길을 확 잡아끄는 순위를 발표했다. 전 세계에서 활동 중인 여성 지휘자들의 순위를 매기면서 한국 출신의 김은선을 1위로 꼽은 것이다. 김은선은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재임 중이며, 최근 들어 뉴욕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등 세계적인 교향악단들의 정기연주회 무대에 연거푸 데뷔하면서 한창 성가(聲價)를 높이고 있다.
'변칙적' 협연 선보인 피아니스트 스티픈 허프
명실상부 국제무대에서 가장 각광받는 여성 지휘자로 부상한 김은선이 지난 7월 10일과 11일, 양일간에 걸쳐 서울시향 정기연주회를 지휘했다. 김은선이 서울시향을 처음 지휘한 것은 아직 코로나 팬데믹이 지속되던 2022년 7월이었다. 당시 1부에서 스위스 첼리스트 크리스티안 폴테라와 루토스와프스키의 첼로 협주곡을 협연하고 2부에서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을 지휘하여 상당히 좋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그로부터 꼭 2년 만에 가진 복귀 무대에서 김은선은 그 사이 경력은 물론이고 실력적인 면에서도 부쩍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년 전 무대에서 이제 막 국제음악계의 메인스테이지에 출사표를 던진 신진의 패기가 돋보였다면, 이번에는 어느덧 메이저 무대에 안착한 기성 지휘자로서의 자신감과 안정감이 두드러졌다. 이번 공연 프로그램은 ‘피아노 협주곡 3번’과 ‘교향곡 3번’의 조합으로 라흐마니노프 일색이었다. 필자는 첫 날 공연을 참관했는데, 영국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가 협연자로 나선 1부는 미처 예상하지 못 했던, 조금은 혹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양상으로 전개됐다.
허프는 사뭇 도발적이고 변칙적인 연주를 감행했는데, 그로 인해 오케스트라와의 호흡이 종종 흐트러지거나 어긋났고, 나이 탓인지 기술적인 흠결도 심심찮게 노출했다. 심지어 독주자와 지휘자의 기저 템포 설정과 작품에 대한 심상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통상적인 관점에서라면 ‘잘못된 연주’, ‘실패한 협연’으로 간주될 소지가 다분한 ‘굴절된 협연’이었다.하지만 언제나 정확하고 잘 들어맞는 연주만이 정답은 아니다. 일회성과 즉흥성이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라이브 연주에서라면 얼마든지 다른 해답과 다양한 선택지가 가능하다. 이 날 허프의 연주는 ‘협연의 객관적 완성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실패작에 가까웠지만, 악곡에 대한 참신한 접근과 재해석의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무척 흥미롭고 시사점도 많았다. 허프는 전반적으로 ‘질주하는’ 템포 위에서 특유의 강단으로 똘똘 뭉친 타건과 변칙적인 프레이징, 의표를 찌르는 타이밍 등을 거침없이 펼쳐 보이며 협주곡에 내재한 ‘경쟁’의 묘미를 극대화했고, 나아가 익숙한 명작에 무척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무엇보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그런 도전과 모험이 가능하다는 점이 감탄스러웠다.
돌이켜보면 ‘악보에 충실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그저 평범하고 지루한, 혹은 별로 의미 없는 연주가 얼마나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런 견지에서 이번 허프의 연주는 지난 6월 말 내한공연에서 같은 곡을 더없이 자유롭게, 또 다른 맥락으로 풀어냈던 미하일 플레트뇨프의 연주와 더불어 청중으로 하여금 작품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매우 흥미진진하고 뜻깊은 시도였다. 한편 이 협연에서 김은선의 지휘도 흥미롭고 주목할 만했다. 그는 협연자의 끊임없는 도발에 최대한 반응하는 동시에 자신이 설정한 기저의 템포를 꾸준히 견지하며 협연자의 지나친 일탈을 차단하려는 듯한 모습도 내비쳤다. 마치 아슬아슬한 연주를 이어나가던 협연자가 일순 선을 넘으려 할 때마다 뒤에서 옷깃을 슬며시 잡아끌어 제자리로 돌려놓는 듯했달까. 비록 3악장 마지막 종결부에서만큼은 갑자기 치고나가는 협연자를 제지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1부에서도 지휘자의 악곡에 대한 주관과 확신을 여러 차례 감지할 수 있었는데, 그런 면은 2부에서 한층 선명하게 드러났다.
2부 프로그램이었던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3번’은 김은선이 올해 뉴욕 필과 베를린 필 데뷔 무대에서도 지휘했던 곡이다. 그만큼 관객들의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는데, 김은선은 그런 관심에 충분히 부응하는 멋진 연주로 화답했다. 이 곡은 일견 다종다양한 음악적 파편들을 얼기설기 이어붙인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어서 자칫 산만하거나 장황하게 들릴 여지가 있는데, 김은선은 악곡에 대한 폭넓은 조망을 바탕으로 연주의 종적인 면과 횡적인 면을 모두 균형감 있게 챙기는 주도면밀한 지휘로 그런 난점을 돌파했다. 그의 지휘에서 가장 돋보인 점은 ‘오페라적 접근’과 절제였다. 다시 말해, 연주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성악적 호흡과 극적 유연성이 돋보였다. 일례로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감수성이 가장 잘 드러난 1악장의 칸타빌레 주제부를 비롯한 서정적 장면들에서는 여유로운 템포 위에서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느낌을 살려 낭만적 정서를 풍부하게 자아냈다. 반면에 작곡가의 모더니즘에 대한 반응이 엿보이는 요소들과 순음악적 전개에 무게가 실리는 대목들에서는 상대적으로 쿨한 표정과 이성적 접근이 두드러졌다. 이처럼 악곡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과 장면들의 성격을 뚜렷이 구분해놓고 그 대비와 균형의 묘를 살리며 극적 흐름을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모습에서 그가 오페라 못지않게 콘서트 지휘자로서도 출중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