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교향악단 이끈 정명훈, 聖母의 비통을 끝없이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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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교향악단 X 정명훈의 마스터즈시리즈 II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똑같은 단원들로 똑같은 레퍼토리를 연주해도 누가 포디엄에 오르느냐에 따라 소리의 질, 크기, 연주의 방향성까지 전부 달라진다. 단발성으로 무대에 오르는 객원 지휘자가 아니라 연간 공연 프로그램, 신입 단원, 협연자 등 악단의 음악 분야를 총괄하는 음악감독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지휘자 정명훈(71)이 KBS교향악단의 차기 음악감독으로 유력하단 소식에 국내 클래식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다. 1998년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를 지낸 정명훈이 차기 음악감독으로 선임된다면 27년 만(2025년)의 악단 복귀가 된다.
12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려
1부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연주
작품 고유의 서정, 매끄러운 음향 살려
2부서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 지휘
경건하면서도 정적인 아름다움 펼쳐내
지난 12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무대를 걸어 나온 정명훈이 지휘한 첫 작품은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4악장으로 구성된 보통의 교향곡과 달리 2악장까지만 작곡돼있지만, 형식적 균형과 음악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어 세계 3대 교향곡 중 하나로 꼽히는 명작이다. 정명훈은 시작부터 마치 악단 전체의 음향적 양감과 밀도를 개선해보겠다는 듯 음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짚어내면서 작품 고유의 서정과 매끄러운 음향을 끌어냈다. 통상적인 연주 속도보다 천천히 진행됐기에 단조로운 인상을 남기는 구간이 더러 있긴 했지만, 연주의 완성도를 떨어트릴 정도는 아니었다. 도입부를 책임지는 첼로와 콘트라베이스 선율에선 지하세계에서 무언가가 솟아나는 듯한 장엄한 분위기는 다소 옅게 표현된 대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미지의 공간으로 서서히 스며 나오는 듯한 신비로움이 충분히 묘사됐고, 객석을 향해 길게 뻗어 나오는 목관의 명징한 울림은 처연하면서도 애달픈 색채를 생생히 불러냈다. 정명훈은 시종 과장된 표현을 경계하는 해석을 선보였다. 1악장에선 이성과 감정의 균형을 살렸고, 2악장에선 긴 호흡으로 슈베르트 특유의 우아한 정서를 그려내면서 깊은 여운을 남겼다.
다음 작품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비통한 심경을 담아낸 종교 음악인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성모 애상)’. 정명훈이 1995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처음 지휘할 때 선택한 작품이자, 따로 음반까지 낸 각별한 작품이다. 1부와 달리 지휘봉도 들지 않은 채 포디엄에 오른 그는 첫 소절부터 작품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보여줬다. 벨칸토 오페라의 거장인 로시니의 작품인 만큼 자칫 화려한 기교와 밝은 색채를 살리는 데 치우치게 되면 특유의 애달프면서도 엄숙한 선율의 매력이 반감되기 쉬운데, 정명훈은 악구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다루면서 경건하면서도 정적인 아름다움을 완연히 펼쳐냈다. 고음과 저음, 장음과 단음, 연결과 단절 등의 대비는 한순간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악단과 합창단(안양시립합창단·인천시립합창단) 소리의 응집력은 높은 수준에서 유지됐다. 중간중간 지휘자의 몸짓과 지시에 유연하게 반응하지 못하면서 선율이 어긋나는 구간이 더러 들리긴 했지만, 빠르게 호흡을 맞추면서 안정된 앙상블을 들려줬다. 소프라노 황수미는 유려한 선율 처리와 깨끗한 음색으로, 메조소프라노 김정미는 소리의 중심이 잘 잡힌 발성과 무게감 있는 색채로 애절한 정서를 극대화했다. 베이스 바리톤 사무엘 윤은 폭발적인 성량과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남다른 존재감을 뽐냈다. 테너 김승직은 성량과 고음 처리에서 아쉬움을 남겼지만, 악단과의 합은 나쁘지 않았다.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오케스트라 반주 없이 오로지 사람의 목소리(합창+독창)로만 채워지는 9곡 ‘예수여 육신은 죽어도’와 마지막 곡 ‘아멘’. 정명훈은 작품의 전경과 후경을 담당하는 음역의 대비를 정확히 짚어내는 동시에 음향의 범위를 첨예하게 조율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끝없이 내면을 파고드는 비탄(悲歎)의 감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첫 음부터 이어진 절제의 과정을 거쳐 최후의 순간 밖으로 터져 나오는 짙은 애수, 응축된 음악적 표현을 점차 증폭시키면서 내뿜는 장대한 에너지는 숨 막힐 듯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정명훈은 모든 힘을 다 쏟아냈다는 듯 포디엄 난간에 기대 잠시 가쁜 숨을 골랐다. 고희(古稀)를 넘긴 세계적인 거장이지만, 여전히 지휘에 대한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 찬 그의 무대에서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어떤 악단을 지휘하느냐’보다 ‘어떤 음악을 들려줄 것인가’ 그 자체라는 것을. 지금까지도 그의 행보에 이토록 많은 사람의 이목이 쏠리는 건 바로 그 순수한 열정을 계속 듣고 싶은 열망의 결과가 아닐까.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