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기근'…초기 벤처 보릿고개

투자 건수 1년새 40% 급감
초기 벤처 시장이 움츠러들고 있다. 주요 벤처캐피털(VC)이 안정적인 후기 투자에 집중하면서다. ‘창업 열풍’이 꺾이며 베팅할 가치가 있는 초기 창업팀 수가 줄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18일 벤처투자 분석 플랫폼 더브이씨에 따르면 상반기 국내 시드 투자(극초기 투자) 총액은 765억원으로 2022년(2064억원)과 작년(1298억원)에 비해 크게 줄었다. 투자 건수도 2022년 상반기 457건에서 2023년 286건, 올해는 163건으로 쪼그라들었다.시드 단계에서 거액의 투자를 받는 스타트업도 자취를 감추는 모양새다. 2022년 상반기에 이스크라(420억원) 등이 큰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고, 지난해에도 디오리진(133억원) 등이 주목받았지만 올 상반기 100억원이 넘는 시드 투자를 받은 곳은 남궁훈 전 카카오 대표가 설립한 아이즈엔터테인먼트(160억원)뿐이다. 한 초기투자사 관계자는 “스타트업을 만들겠다는 대학생들이 없어 쫓아다니며 창업을 권유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확 식은 창업 열풍…VC '벤처 찾아 삼만리'
초기 투자사, 대학 찾아 권유…심사역이 발로 뛰며 회사 발굴

벤처 투자사들이 후기 투자에 집중하면서 초기 스타트업 투자시장이 쪼그라들고 있다. 투자가 위축되니 창업에 나서는 인재가 줄고, 유망 창업팀을 찾지 못해 계획된 투자까지 포기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모양새다.

○초기 투자 비중 하락

18일 업계에 따르면 호황기에 초기와 중후기 투자를 모두 진행한 대형 투자사들은 최근 들어 회수 가능성이 높은 후기 투자에 집중하고 있다. 올 상반기 국내 시드 투자 규모는 765억원으로 전년(1298억원)보다 크게 줄었다. 시리즈A까지 들여다봐도(시드~시리즈A) 9264억원으로 전년(1조2757억원)보다 감소했다. 2022년 이후 80%대 안팎을 유지했던 초기 투자 비중은 올해 76%까지 떨어졌다. 벤처 혹한기에 리스크가 큰 초기 투자보다는 안정적인 회수가 가능한 후기 스타트업에 돈이 몰린 영향이다.‘벤처 투자의 꽃’이라고 불렸던 초기 투자가 주춤하면서 벤처 생태계가 움츠러들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벤처캐피털(VC)업계 관계자는 “예전엔 창업 후 유니콘기업으로 성장시킨 선배나 동료를 보고 창업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지금은 명확한 롤모델이 없다”며 “움츠러든 초기 투자를 다시 살릴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업계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과거보다 스타트업 창업이 힘들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인공지능(AI)과 로보틱스 등 딥테크 영역은 진입장벽이 높아 기술력 없이 뛰어들기 쉽지 않다. 플랫폼 영역은 기존 플레이어들이 선점하고 있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좁다.

업계 관계자는 “학창 시절 ‘S급 개발자’ 소리를 듣던 젊은 인재들이 스타트업 창업 대신 빅테크 취업을 택하고 있다”며 “아이디어가 좋은 스타트업도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살아남기 힘들다는 비관론이 확산하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창업자 기근’ 시대

초기 투자에 집중하는 투자사들도 고민이 많다. 창업 희망자 자체가 줄어서다. 카카오벤처스는 앱스토어에 등록된 앱의 관심도·이용도 변화를 자동으로 감지해 투자팀에 알림을 보내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투자할 만한 초기 창업팀을 찾기 위해서다. 회사 관계자는 “특정 영역을 찍은 후 관련 팀을 찾는 ‘톱다운’ 방식으론 유망 창업자를 발굴할 수 없다”며 “심사역들이 미국 대학교 등 인재가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고, 스타트업 채용 공고도 살핀다”고 했다.

또 다른 초기 투자사인 퓨처플레이는 국내외 대학에서 열리는 창업경진대회에 참석하는 횟수를 늘리고 있다.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은 주요 대학 연구실을 방문해 창업을 권유한다. 투자 혹한기에 유망 창업팀 수가 줄면서 밑바닥부터 직접 찾아다니지 않으면 좋은 투자처를 발굴하기 어렵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의 스타트업 재직자 설문에서 창업 고려율은 2022년 58.0%에서 2023년 47.2%로 떨어졌다. 취업준비생의 창업 고려율도 51.0%에서 45.5%로 하락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