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연인과 이별한 김소월은…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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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S17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김소월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림자 같은 벗 하나이 내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쓸데없는 괴로움으로만 보내었겠습니까!
오늘은 또 다시, 당신의 가슴속, 속모를 곳을
울면서 나는 휘저어 버리고 떠납니다 그려.허수한 맘, 둘 곳 없는 심사에 쓰라린 가슴은
그것이 사랑, 사랑이던 줄이 아니도 잊힙니다.
* 김소월(1902~1934): 평북 구성 태생.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시집 <진달래꽃>.
오는 9월 8일은 시인 김소월이 탄생한 지 120년이 되는 날입니다.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가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에서 첫울음을 터뜨린 날이지요. 소월의 고향은 봄마다 산꽃이 지천으로 피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옥녀봉에서 만나 풀피리 불던 소녀
할아버지가 개설한 독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한 그는 곧 남산소학교에 입학했지요. 같은 반 동네 소녀 오순과 친하게 된 뒤로는 옥녀봉 냉천터에서 자주 만나곤 했습니다. 바위에 올라 함께 피리를 불거나 노래를 불렀고, 숲 사이의 시냇가를 거닐기도 했죠. 어릴 때의 이런 추억은 훗날 ‘풀따기’라는 시에도 잘 묘사돼 있습니다.“우리 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 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져요.”(일부 발췌)오순은 의붓어미 밑에서 자랐는데 집이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 아래로 동생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니 더욱 궁핍했죠. 소월이 숙모에게 들은 전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시 ‘접동새’의 주인공과 비슷한 처지였다고 할까요.
소월은 열세 살 때 고향을 떠나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중학부에 진학했습니다. 거기에서 평생 스승인 안서 김억을 만났죠. 오산에서 소월의 학업성적은 늘 우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열네 살 되던 해 그는 할아버지에 의해 강제결혼을 하게 됐어요. 상대는 할아버지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이었습니다. 그녀는 소월보다 한두 살 연상이었죠.아내와의 결혼 생활은 비교적 원만했지만 강제결혼인 데다 마음속에 품은 연인이 있었기에 내심 갈등도 없지 않았던 듯합니다. 오순과의 이별은 가슴 아픈 일이었지요. 그러나 소월에게는 주옥같은 사랑 시를 쓰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연구자들에 따라 이설(異說)이 있긴 하지만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도 그중 한 편이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림자 같은 벗 하나’ 때문에 ‘많은 세월을 쓸데없는 괴로움으로만 보내었’지만 아직도 ‘허수한 맘, 둘 곳 없는 심사에 쓰라린’ 사랑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 시 속에 애잔하게 녹아 있지요.
옛 연인 장례식에서 돌아와 쓴 ‘초혼’
오순은 열아홉 살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의처증이 심한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직후 소월은 억누를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시 한 편을 썼습니다. 그게 바로 ‘초혼’이지요.(물론 이 부분도 이견이 많습니다.)“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며 그녀의 혼을 소리쳐 부르다가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라며 흐느끼는 시인의 비탄이 아프게 들려오는 듯합니다.
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향에서 찌든 생활을 하던 소월은 서른두 살이 되던 1934년 겨울에 아편을 술에 타 마시고 짧은 생을 마감했지요. 그가 죽은 날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습니다.
그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잊지 못하던 첫사랑에게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한’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를 산산이 부서진 그 이름 앞에 가서야 결국 건넸을까요.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고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었던, 사랑하던 그 사람, 사랑하던 그 사람에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