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밖으로 못 뱉을 얘기만 하는 폰 트리에의 20년 전 역작이 있다
입력
수정
[arte] 허남웅의 씨네마틱 유로버스영화계에는 창작과 관련한 많은 명언이 있다. 봉준호 감독이 마틴 스콜세지의 발언을 인용해 아카데미 영화제의 감독상을 받으면서 밝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수상 소감은 웬만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건 이거다.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미지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어느 감독이 한 말일까. 발표하는 작품마다 선을 넘는(?) 설정과 묘사로 영화계 안팎을 시끄럽게 한 덴마크 출신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한국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연출 데뷔 40주년을 기념해 대표작 12편이 7월 10일부터 23일까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전’이라는 타이틀로 상영됐기 때문이다. 국내에는 공식적으로 상영된 적 없는 데뷔작 <범죄의 요소>(1984)와 <에피데믹>(1987)을 비롯하여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어둠 속의 댄서>(2000), 19금 묘사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이자 주제가 되는 <님포매니악>(2013)의 감독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서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6)이다.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고, 출연한 에밀리 왓슨이 영화 연기 데뷔작부터 아카데미 영화제 여우 주연상 후보에 오른 <브레이킹 더 웨이브>는 또한, <듄> 시리즈의 하코넨 남작으로 한국 팬에게도 잘 알려진 젊은 시절의 스텔란 스카스가드를 볼 수 있기도 하다. 에밀리 왓슨, 스텔란 스카스가드는 출연만으로 해당 영화에 독특한 오라를 발산하는 배우로 커리어를 쌓아 왔다. 이들 배우는 캐릭터로 표현하는 묘사의 수위 진폭이 극과 극을 오가면서도 늘 인상적인 연기를 펼쳐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1996년 제49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에밀리 왓슨
스텔란 스카스가드가 부부로 호흡
진정한 종교라면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포용할 수 있어야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로 평가받는 <펀치 드렁크 러브>(2003)의 사랑스러운 에밀리 왓슨과 <굿 윌 헌팅>(1998)의 교수, <맘마미아!>(2008)의 아빠 후보 등 무해한 인물상을 보여줬던 스텔란 스카스가드를 기억한다면 이 두 사람이 부부로 출연해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나누는 사랑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를 보기 좋게, 아니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배반하는 까닭에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에서 에밀리 왓슨과 스텔란 스카스가드는 각각 베스와 얀으로 출연해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부로 연을 맺는다. 특히 베스의 주변에서 얀과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얀이 유전에서 일해야 해서 결혼하더라도 신혼여행이 다 뭐야 첫날 밤만 지내고 나면 바로 헬기를 타고 떠나야 하는 까닭이다. 스코틀랜드 섬마을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외부로 나가본 적이 없는 베스는 보수적인 데다 고집도 세다. 타고난 성격이 그런 탓도 있지만,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란 탓도 크다. 특히 종교와 관련해서 그렇다. 베스가 모태 신앙으로 믿고 있는 종교는 남편을 섬기라고 가르치는데 그 때문에 베스는 얀의 부탁이면 그게 비윤리적이고 자기 파괴적이라고 해도 거부하는 법이 없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가 관객을 불편하게 하고 논란을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지점이 여기다. 얀은 유전에서 머리에 타격을 입고 전신이 마비되는 부상을 입는다. 부부 생활이 더는 불가능해지자 얀은 다른 남자와 만나 사랑을 나누라며 그리고 그 과정을 하나하나 자세히 소개해달라며 베스에게 비상식적인 제안을 건넨다. 얀을 하늘같이 섬기는 베스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 그다음 날부터 외간 남자를 만나 몸을 섞으려는 시도를 한다. 어떤 빌어먹을 놈은 얼씨구나 이에 응하고, 어떤 신사는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베스를 집으로 돌려보내려 안간힘을 쓴다. 압권은 교회 사람과 동네 아이들의 반응이다.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거늘 멋모르고 까부는 아이들은 차치하고 애초 말도 안 되는 가르침을 하사해 베스를 시험에 들게 하고 손가락질하며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일부 성직자와 교인의 행태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가 논란으로 관심이나 끌어보려는 얕은 수의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많이들 알고 있어도 논란이 두려워 웬만해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는 불편한 진실을 라스 폰 트리에는 과감한 설정과 파격적인 묘사로 도마 위에 올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전제로 모든 형태의 사랑을 옹호하는 라스 폰 트리에의 생각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닐 터. 다만,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은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그 자신의 예술적 철학을 영화로 실천했다는 점에서 그가 왜 인권 유린과도 같은 행위로 베스를 사지로 내몰았는지 그 의도를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면서 라스 폰 트리에는 어떻게든 베스와 얀의 사랑이 결실을 보는 형태로 결말을 가져간다. 교회의 꼴은 갖추고 있으면서 정작 종(bell)이 없어 울리지를 못하는 섬의 종교 시설은 베스를 포용하지 못하는 관계자들만큼이나 왜곡된 형태다. 진정한 종교라면 베스와 얀의 사랑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라스 폰 트리에의 생각으로 이 종은 특정 종교나 특정 지역이나 특정 정체성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형태로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결말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베스와 얀의 사랑은 개인적이면서 종교적이고, 숭고하면서 일반적인 의미로까지 모든 범위를 커버한다. 이를 두고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창자를 뒤틀게 하는 멜로드라마. 괴담. 조심할 것. 놀랄 만큼 독창적”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예술은 상상력에 제한을 두지 않을 때 위력을 발휘한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가 바로 그런 예다.허남웅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