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레이더] "아직도 땅이 질퍽질퍽"…농작물 침수·더딘 복구 '망연자실'

집중호우 2주 지났는데 물 안 빠져…"인건비·비룟값까지 모두 증발"
밥상 물가 들썩·과일 당도 저하 우려…특별재난지역 추가 지정 호소
기록적인 폭우가 한바탕 휩쓸고 간 자리엔 농민의 긴 한숨만이 남았다. 유례없는 굵은 빗줄기에 곳곳에서 둑까지 무너지며 검붉은 흙탕물이 삽시간에 농작물을 뒤덮었다.

초록빛 벼 물결이 일렁이던 옥토는 온통 뻘밭으로 변했고, 애써 키운 밭작물은 물에 잠겨 영 못 쓰게 됐다.

그나마 빗물에서 건진 작물조차 썩거나 상해 아예 길가에 내다 버리는 일도 침수 농가에선 흔하게 눈에 띈다. 정부와 지자체, 군부대 등이 두 팔을 걷어붙였지만, 갈 길이 먼 복구를 바라보는 농민들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 "농사 못 짓겠다"…농장주 한숨 소리 가득
전북 익산시 망성면에서 만난 이모(71)씨는 빗물에 알이 다 터지고 으깨진 방울토마토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비가 지겹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이 일대는 지난 8∼10일 최대 400㎜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상추, 수박, 방울토마토 등을 재배하는 시설하우스 대부분이 물에 잠겼다. 연일 내린 장맛비에 24일 현재까지도 물이 다 빠지지 않아 일부 농가는 썩어가는 농작물을 그저 바라만 보는 처지다.

이씨는 "방울토마토 비닐하우스만 30년 넘게 했는데, 이렇게 물이 차면 오랜 경력도 소용이 없다"며 "인건비에 비룟값까지 돈이 다 증발해버렸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충남 금산군 제원면에 있는 박용남(72)씨의 깻잎·가지 시설하우스도 이번 집중호우로 물에 잠겼다. 폭우가 그친 지 2주가 지났지만, 여전히 침수된 농기계를 정비하고 물에 젖은 비료와 포장 상자 등을 들어내는 등 뒷정리를 하느라 정작 농작물 수습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박씨는 "어떻게든 남은 것들이라도 살려보려고 했지만, 사람 키만큼 물이 들어차다 보니 속수무책이더라"면서 "차라리 (깻잎을) 빨리 말려서 갈아엎으려고 하는데, 날씨가 흐려 그마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경기 파주시 파평면에서 만난 버섯 농장주 이재흥(57)씨는 "여기서 계속 농사해야 할지,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씨의 농장은 지난 17∼18일 이틀 동안 600㎜ 가까이 쏟아진 폭우에 직격탄을 맞았다.

표고버섯을 키우기 위해 하우스 안에 쌓아놓았던 참나무는 하우스가 잠기면서 무용지물이 됐고 종균, 톱밥 배지, 냉난방기, 농기계도 흙탕물 범벅이 됐다.

이씨는 "지금은 흙이 질어 기계가 들어갈 수 없다.

하우스를 정리하고 소독을 한 뒤 종균을 넣는데 최소 3개월은 걸릴 것 같다"면서 한숨지었다.
◇ 축구장 1만7천개 면적 침수…과일·채솟값 들썩이나?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16∼21일 집중 호우에 따른 전국 농작물 침수 면적이 22일 오후 6시 기준 1천389㏊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앞서 7∼10일 내린 폭우로 인해 침수된 농작물 면적(1만756㏊)을 더하면 이달 집중호우로 인한 침수면적은 1만2천109㏊로 늘어난다.

이는 축구장(0.714㏊) 약 1만6천959개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이 기간 가축 80여만마리가 폐사했으며, 이 중 대부분은 육계 등 가금류였다.

채소 농가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시설 하우스가 밀집한 곳에서 침수가 발생하면서 밥상 물가가 벌써 들썩이는 모양새다.

농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등에 따르면 지난 19일 적상추 소매가격은 100g에 2천107원으로 1주일 만에 56.3% 올랐다.

이는 한 달 전의 891원보다 136% 올랐고, 1년 전보다 16.5% 높다.

2019년부터 작년까지 가격 중 최대·최소를 제외한 3년 평균치인 평년 가격과 비교해도 48.5% 비싼 수준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상추는 가락시장 반입량의 절반 이상을 재배하는 충남 논산, 전북 익산에 침수가 발생하면서 이달 출하량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아직 가격 변동 폭이 크진 않지만, 출하를 앞둔 과수 농가에서도 침수 피해가 속속 보고되고 있다.

경북에서는 참외와 포도, 복숭아 농가가 광범위한 침수 피해를 봤고, 충남과 전북에서도 수박, 토마토, 멜론 재배 농가 다수가 물에 잠긴 것으로 파악됐다.

충남 부여군 세도면에서 애플수박 시설하우스를 하는 임희윤(54)씨는 "이번 수해로 비닐하우스 전체가 물에 잠겼다"면서 "벌써 2주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땅이 질퍽질퍽해 기계도, 인력도 투입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전했다.

침수 피해가 없는 과수 농가들도 연일 들리는 비 소식에 당도 저하를 우려하고 있다.

전북 김제시에서 포도 농장을 운영하는 김모(62)씨는 "아무래도 비가 많이 내리면 일조량 부족으로 전반적인 과일 당도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며 "이제 곧 출하하는데 비가 좀 그만 내려야 상품성을 지난해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걱정했다.
◇ 더딘 수해 복구에…'우리도 특별재난지역으로'
비가 그친 지역에서는 공무원과 군 장병, 종교계, 시민단체 등이 팔을 걷어붙이고 수해 복구와 수재민 돕기에 나섰다.

육군 제35보병사단 장병 1천500여명은 익산시 망성·용안면 일대 시설하우스 오물 제거와 침수 가옥 청소를 하느라 연일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익산·전주시자원봉사센터, 원불교 중앙·전북교구, 전주연탄은행 관계자 등도 수해 현장으로 달려와 복구에 힘을 보태고 있다.

대전 서구 용촌동 정뱅이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최근 한 유튜버가 침수 피해를 본 마을에 생필품과 가전제품을 기탁하기도 했다.

침수 피해를 본 구독자의 사연을 듣고 직접 이 마을을 방문한 유튜버 보겸(본명 김보겸)은 피해 현장을 둘러보고, 생필품은 물론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 선풍기, 밥솥 등을 마을로 보냈다.

이 밖에 수해 지역을 중심으로 민간 기업과 개인 후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지자체들은 무엇보다 '특별재난지역 선포'가 절실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부가 지난 15일 특별재난지역으로 충북 영동, 충남 논산·서천, 전북 완주, 경북 영양군 입양면 등 5개 지자체를 지정했지만, 이보다 큰 피해를 본 곳이 많아 추가 지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 복구비 일부를 국비로 지원받고, 주민에게는 재난지원금 지원, 국세·지방세 납부 면제, 공공요금 감면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직접적인 예산 지원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더딘 수해 복구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게 지자체들의 설명이다.

익산시와 금산군은 최근 재난관리 정보시스템(NDMS)에 접수된 집중호우 피해 규모가 각 400억원을 넘어섰다면서 신속한 복구를 위해 특별재난지역 지정을 건의했다.

이보다 피해액이 크지는 않지만, 전북 군산시와 충남 부여군, 충북 옥천군 등도 수해 복구를 위해 포괄적인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호소했다.

박범인 금산군수는 "피해 건수가 많고 상황이 심각해 집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며 "충남에서는 논산, 서천만 특별재난지역에 선포돼 아쉬움이 있다.

금산도 추가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헌율 익산시장도 "피해 규모에서 알 수 있듯 수해를 겪은 주민들의 상처가 매우 큰 상황"이라며 "피해 주민들이 한시라도 빨리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특별재난지역 지정과 복구에 속도를 내겠다"고 강조했다.
(박주영 양지웅 김혜인 김경태 이승형 천경환 노승혁 신민재 정종호 신선미 정경재 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