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여, 설움 없는 새 세상에서 영면하시게

'친구' 함께 부른 김민기 절친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 추모글

"신입생 환영회때 부른 즉흥 노래
오늘 작은 목소리로 불러보다
차마 이어가지를 못하겠더라"

"천재적 예술가로 태어난 친구
우리 문화의 소중한 선구자
그대는 국민의 사랑을 받았네"
24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 꿈밭극장(옛 학전)에서 열린 김민기의 노제에서 고인의 영정이 운구되고 있다. 김범준 기자
우리 모두의 ‘친구’ 김민기를 보내며….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김영세 대표(오른쪽)는 김민기와 함께 ‘도비두’라는 팀으로 노래 ‘친구’를 불렀다. 김영세 제공
‘친구’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민기와 내가 대학생 때 함께 부른 노래입니다. 50년이 흘러간 오늘, 친구 김민기를 떠나보내며 유튜브 ‘도비두’의 동영상에 올라온 나와 민기의 듀엣송 ‘친구’를 다시 들어봤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혼자 따라 부르다가 차마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민기가 만든 곡의 가사가 ‘눈앞에 보이는 친구의 모습…’으로 이어 나갈 때 나는 50년 전 우리 둘의 모습을 떠올려봤습니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이라는 가사를 노래하는 민기의 음성은 약간 떨리듯 들려와서 마음이 아팠습니다.도비두의 ‘친구’라는 음반은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리고 민기에게는 나와 듀엣으로 만든 유일한 음반입니다. 내가 서울대 미술대학에 민기보다 1년 늦게 입학했을 때 우리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났고 200명도 안되지만, 전교생이 보는 무대에서 즉흥적인 듀엣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학생들은 수군거리며 우리를 ‘도비두’라고 부르기 시작했죠. 서울대 미대 여학생들이 우리에게 지어준 이름이었죠.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도깨비(?) 같은 대학 생활을 했고 김민기의 창작 일생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오늘 참 힘든 날을 맞이했습니다. 이제는 ‘친구’의 대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떠나는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를 이틀째 찾다가 “민기야, 너는 이제 하늘나라에서 마음껏 꿈을 이어가 보렴…”이라는 말을 해주려 합니다.평생 창작을 이어온 친구에게 어떤 다른 말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김민기는 열정 속에서 평생 창작 생활을 했고 땅 위에서의 인생은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흔적은 우리나라 전역에 매우 짙게 깔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김민기가 만든 음악을 기억할 것이며 그가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배우들의 연기를 즐길 것입니다. 김민기는 천재적 아티스트로 태어나서, 아낌없이 창작하면서, 행복한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좀 더 우리 곁에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많은 사람에게 남긴 채로….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 평생 이뤄온 자신의 작품’을 남긴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20세 전후에 작곡과 작사를 했던 ‘친구’와 ‘아침이슬’은 온 국민의 가슴을 흔들었고, 30년 전 개척한 ‘학전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대형 연기자들을 배출했죠. 그리고 나에게는 김민기가 그림에도 천재적인 재질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김민기가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에게 선물한 그림. 김영세 제공
내가 민기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 둘은 경기고 미술반 학생이었고, 몇 년 후에는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다시 만났는데 당시 민기는 그림의 세계에도 미쳐 있던 것 같았습니다. 민기의 대학 시절 그림이 50년이 흘러간 지금도 시대를 초월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그 작품은 민기가 내 어머니에게 선물했다고 말한 작품입니다.

도비두로 활동하던 대학 시절 민기와 나는 함께 우리 집에서 듀엣곡을 만들고 연습하면서 많은 날을 보냈는데, ‘늘 밤참을 준비해 주시면서 늦은 시간까지 돌봐주신 나의 어머니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자신의 소중한 그림을 선물했었다’고 말할 때 민기의 진심 어린 마음을 보면서 울컥했던 기억은 잊히지 않네요.

대학을 마친 뒤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민기는 한국에서 엄청난 양의 음악을 창작했습니다. 김민기의 음악은 그의 가슴에서 튀어나왔죠. 그리고 가사 하나하나는 그가 세상에 알리려 한 ‘절규’와 같았습니다. 그를 대단한 ‘시인’이라고 평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혹자는 그를 ‘자유를 추구하는 운동권의 리더’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김민기를 ‘저항권’에 가둬두지 않기를 호소합니다. 김민기는 천재적 아티스트이고 사람을 위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순박한 사람입니다. 국민과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이 그의 뜻과는 다른 각도로 여론을 일으킨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김민기는 창작의 예술가이면서 박수갈채보다는, 그의 작품을 보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났어도 그가 남긴 창작물의 메아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하늘이 우리나라에 내린 보물입니다. 내가 추모의 글을 남기는 이유는 김민기의 진면모를 알림으로써 우리나라 후세의 또 다른 창작자를 배출하는 계기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김민기를 표현하면 ‘김민기는 천재적 예술가로 태어나 세상과의 타협보다는 자신의 진심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창작에 인생의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아티스트, 그리고 우리나라의 문화에 뿌리를 내린 소중한 선구자’입니다.

이제 나는 나의 ‘친구’를 보내며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아침이슬처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라는 기막힌 한 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낸 스무살 때 당신의 한마디는 후세의 온 국민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답니다. 이제 당신은 우리나라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고, 당신에게는 더 이상 서러움도 없습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땅에서와 같이 마음껏 창작을 계속하면서 영면하십시오.”

2024년 7월 24일 김영세 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