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록의 발레리나 김지영 "그만 해야지 하는데 자꾸 불러줘요"
입력
수정
섭외 1순위 무용수 발레리나 김지영,발레는 젊음의 예술이라 불린다. 춤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되면 무대에서 내려와야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무용수의 전성기는 무척 짧다.
국립발레단 은퇴 후에도 활발히 무대 서다보니 전민철과 2인무에
다음달 일본 초청 공연, 11월 서울시발레단 컨템퍼러리 작품에도 참여
여전히 무대 위에서 전설 써 내려가는 프리마돈나
한국이 낳은 최고의 프리마돈나 김지영(46)은 그런 세상의 말과는 동떨어진 인물이다. 1997년부터 2019년까지 수석무용수로 살았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건 한국 국립발레단에서건 수석이었다. 심지어 발레단을 떠나도 여전히 무대 러브콜을 받는 1순위 무용수다. 과거의 전설이 아닌, 아직도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현재진행형 발레리나다. 2019년 국립발레단을 떠나 학교로 갔지만 퇴단 이후 5년간 훨씬 더 많이 무대 위에 섰기 때문이다. 찜통 더위와 장대비가 오락가락하던 지난 23일 그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만났다. 김지영은 이날도 "한예종 무용원에서 파드되(남녀 2인무) 연습을 하다 왔다"고 했다. 다음달 3~4일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공연 준비를 위해서다. 파트너는 무용원에 재학중인 스무살 발레리노 전민철.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입단 시험을 통과해 화제를 모았던 그 라이징 스타다.
"제가 주인공으로 서는 무대는 아니에요, 원래 일본 신도쿄극장이 <발레 아스테라스 2024>라는 기획 공연을 진행하는데, 전민철씨를 포함해 한예종 무용원 무용수들을 특별 게스트로 초청했대요. 그런데 민철씨랑 함께 2인무를 준비하던 발레리나가 부상을 입어 대타 연락이 왔고 정말 얼떨결에 무대에 서게 됐어요."
그에게 급하게 연락을 취한 인물은 누굴까. 그와 한국 발레의 르네상스기를 함께 꽃피웠던 김용걸 한예종 무용원 교수다. 둘은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정도로 절친한데다, 국립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서 수도 없이 파트너로 춤을 췄다. "전민철씨와 무대에 서게 되는 작품은 <산책(2017)>이란 작품이에요. 쇼팽의 선율에 맞춘 2인무 작품인데 '용걸이 오빠'가 안무가로서 인정받은 대표작이에요, 저도 함께 춰봤기에 익숙합니다." 김용걸 교수는 그를 섭외하며 "연륜이 있는 무용수와 젊은 무용수가 파드되를 하면 더욱 훌륭한 시너지가 나겠다"며 그를 설득했다고. 김용걸과 김지영은 공통점이 많다. 세계 정상급 발레단(김용걸은 파리 오페라발레단에서 활동했다)의 무용수로서 뛰어본 경험이 있고, 그 경험으로 국립발레단의 기량을 월드 클래스 급으로 성장시켰다. 이어 무용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는 점도 같다. 심지어 이날 파리오페라발레단의 갈라 공연까지 나란히 '바른 자세'로 앉아 관람하는 모습마저 닮아 있었다.
발레리나 김지영은 은퇴 후 1년이 지났던 2020년에 "무대를 완전히 끊어볼까"라고 생각했다. 코로나19로 공연 기회도 줄고, 가르치기만 하는 삶은 어떨까 궁금했다. 하지만 초대가 끊이지 않았다. "재능이 아깝다, 출 수 있을 때까지 보여줘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설득당해서다."매년 이제 그만 해야지, 그만 해야지 생각은 하는데 결국은 무대에 나가게 돼요. 그리고 또 무대에 서면 살아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요. 어느새 제가 손유희(올해 초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은퇴한 수석무용수)에게 너도 계속 춤을 추라고 했어요." 최근 손유희는 M발레단의 <돈키호테>에서 성공적으로 공연했다.
발레단 소속 프로 무용수일 때와 프리랜서인 지금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는 "순도 100%로 즐길 수 있다는게 프리랜서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프로 무용수일 때는 무대가 엄격한 곳으로 느껴졌어요. 숨을 곳도 없고 여러가지 압박도 많았고, 상대적으로 즐길 수 있는 여력이 부족했어요. 이제 자유롭게 춤을 추다보니 왜 나는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할까, 춤의 본질은 무엇일까에 대해 더 잘 와닿아요."김지영은 오는 11월 서울시발레단에서 선보일 컨템퍼러리 작품 <캄머 발레>에도 참여한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2002년-2009년)에 있던 시절에 경험했던 작품이어서 그의 감회는 더욱 새로워보였다. "안무가 한스 판 마넨의 작품인데 아시아 초연입니다. 지난 3월 서울시발레단 일을 도와주던 무용계 인사가 이 작품을 공연할 거라고 하길래,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줄게'라고 했던 걸 계기로 공연하게 됐어요. 무용수로서 돕겠다는 게 아니었는데 또 무대에 서네요(웃음)." 17년전 캄머 발레에서 그가 배웠던 건 춤을 추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안무가가 제가 연습하는 걸 보고 '순서만 외워서는 안 돼!'라며 연습실에서 나가버렸어요. 그 때 부예술감독이던 분이 저를 잡고 음악을 동작에 쓰는 방법이라든지, 강한 내면을 춤으로 끌어내는 방식이라든지 많은 걸 알려주셨어요."캄머 발레는 스토리가 없는 30여분의 짧은 작품이다. 다만 8명의 무용수들이 나와 2인무를 추는데 수많은 인간 관계를 춤으로 표현한다. "조지 발란신이 말했었는데요. 저도 발레에는 구체적인 스토리가 꼭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2인무면 그 두 무용수가 몸으로 표현해내는 관계에 집중하면 되고 거기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거죠."
2024년 지금의 김지영에게 발레란 어떤 의미일까.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를 살게 만드는 것. 무대에서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저는 발레를 하고 있을 거에요."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