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사마 호박' 사는 미술애호가들에 위스키 파는 서울옥션

서울옥션 7월 ‘아트 라이프 밸런스’ 경매 진행
미술작품 외에 초고가 위스키, 와인, 명품 선봬
서울옥션이 지난 19~21일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나라셀라와 함께 진행한 와인 팝업 장터. /서울옥션
지난 19일 서울 신사동 서울옥션 강남센터에 ‘술꾼’들이 나타났다. 술에 제법 일가견이 있다면 들어봤을 법한 와인과 브랜디, 위스키들이 1층 로비를 가득 채우면서다. 서울옥션이 국내 주요 와인 수입사인 나라셀라와 함께 진행한 와인 팝업 장터였다. 미술 작품들의 공간인 줄만 알았던 옥션이 연 이색 주류 장터에서 한참 쇼핑을 즐긴 3040 젊은 고객들은 이내 경매 출품작이 전시된 5층으로 향했다.

이배, 전광영 같은 유명 작가들의 회화 작품과 함께 ‘억’ 소리 나는 술들이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무려 57년이나 숙성된 최고급 한정판 싱글몰트 위스키로 전 세계 단 400병 밖에 없어 2억5000만원의 시작가가 붙은 ‘맥켈란 라리끄(The Macallan in Lalique 57 Year Old)’를 비롯한 주류 25점이다. 미술 작품들을 보기 위해 프리뷰를 찾은 컬렉터들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위스키와 와인에 관심을 가졌다. 쉽게 만날 수 없는 럭셔리 위스키와 빈티지 와인 역시 ‘예술’의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지난 19일 서울옥션 강남센터 5층에 전시된 위스키와 와인들의 모습. /유승목 기자
미술 경매에 등장한 맥캘란과 루이비통

서울옥션이 독특한 경매를 진행하며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다. 25일 미술계에 따르면 서울옥션은 지난 23~24일 열린 7월 라이브·온라인 경매를 ‘아트 라이프 밸런스(A-L-B)’로 이름 짓고 다양한 품목의 작품을 선보였다. 23일 열린 ‘데이(Day) 1 경매’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색 호박(7억~10억원), 살보의 풍경화(1억2000만~2억원) 등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내놓은 주류 경매품이 대표적. 연일 신고가를 써 내려가는 인기 작가 정영주의 ‘저녁길 15825’가 경합 끝에 5900만 원에 낙찰되는 가운데 주류 품목들도 23점(2점은 출품취소) 중 11점이 새 주인을 찾으며 47.8%의 낙찰률을 보였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 중 최고가를 자랑하는 페트뤼스 와인 2004년, 2005년산 두 병은 1800만 원에 낙찰됐다.
서울옥션이 7월 '아트 라이프 밸런스' 첫 날 경매에서 선보인 페트뤼스 와인(Lot. 103). 1800만 원에 낙찰됐다. /서울옥션
이튿날 진행된 ‘데이(Day) 2 경매’에 나온 출품작들은 더욱 흥미로웠다. 회화, 조각 등 국내 미술품 경매하면 떠오르는 작품 대신 라이프스타일 물건들로 경매 랏(Lot)이 채워졌기 때문. 이날 경매에선 한스 베그너의 디자인 가구와 유럽 골동품점에서 볼 법한 찻잔 같은 테이블웨어를 비롯해 에르메스와 루이비통, 샤넬 등 명품 브랜드의 가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중 쿠사마 야요이와 협업한 루이비통 가방이 450만 원에, 아야코 록카쿠의 그림이 담긴 러그가 900만 원에 낙찰돼 눈길을 끌었다.한국 미술계 메가 이벤트인 9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이 자리를 잡아가며 7월은 시장에서 ‘폭풍전야’처럼 잠깐 ‘쉬어 가는 달’처럼 인식되고 있다. 블록버스터급 전시 등 각종 행사가 8~9월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옥션은 7월을 ’쉬어 가는 달’ 대신 ‘실험하는 달’로 삼고 경매가 가능한 상품 영역 확대에 나선 것이다. 정태희 서울옥션 경매사업팀장은 “문화·예술을 일상에서도 향유하게 되면서 미술품 수집이나 관람에 취미를 가진 젊은 층이 와인이나 위스키도 빠지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번 경매를 예술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아트 라이프 밸런스’로 지은 것도 이런 이유”라고 말했다.
서울옥션이 지난 24일 '아트 라이프 밸런스' 경매에서 선보인 쿠사마 야요이와 루이비통이 협업한 가방. 450만 원에 낙찰됐다. /서울옥션
럭셔리 명품 구매자가 곧 미술 컬렉터

수익성에 물음표가 따라붙는 상황에서도 서울옥션이 이색 경매를 연 것은 미술시장 불황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연계 상품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려는 포석이다. 값비싼 주류나 명품, 인테리어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곧 미술품을 수집하는 잠재적 컬렉터일 것이란 관측에서다. 서울옥션은 지난달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백색의 건축가’로 불리는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에 참여한 서울 반포동 주거시설 ‘더 팰리스 73’ 오피스텔 분양권을 경매에 선보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 물건은 시작가를 뛰어넘는 219억 원에 낙찰됐는데, 이 역시 유명 건축가의 철학이 구현한 만큼, 큰 틀에서 예술품이라는 것이다.
서울옥션이 6월 미술품 경매에서 선보이는 서울 서초구 '더 팰리스 73' 주거시설의 조감도. /서울옥션 제공
실제로 크리스티, 소더비, 필립스옥션 등 글로벌 경매사들은 미술작품뿐 아니라 주얼리나 럭셔리 명품, 하이엔드 시계 등으로도 매출을 일으키고 있다. 올해 상반기 21억 달러(약 2조 9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한 크리스티에서 명품은 3억6200만 달러(약 5000억 원)의 매출액으로 두 번째로 수익성 좋은 부문이었다. 크리스티의 경우 자사에서 명품 브랜드 가방을 구매하거나 응찰한 고객 38%가 미술품 등 다른 품목의 응찰에도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옥션이 7월 '아트 라이프 밸런스' 경매에서 선보인 최고급 한정판 싱글몰트 위스키 ‘맥켈란 라리끄(The Macallan in Lalique 57 Year Old)’. 400병 밖에 없는 제품으로 추정가 2억 5000만~3억 5000만 원에 출품됐다. 본 경매에선 출품 취소됐다. /유승목 기자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