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遊南嶽(유남악), 宋翼弼(송익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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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遊南嶽(유남악)宋翼弼(송익필)

草衣人三四(초의인삼사)
於塵世外遊(어진세외유)
洞深花意懶(동심화의나)
山疊水聲幽(산첩수성유)
短嶽盃中畵(단악배중화)
長風袖裏秋(장풍수리추)
白雲巖下起(백운암하기)
歸路駕靑牛(귀로가청우)

[주석]
遊南嶽(유남악) : 남악을 유람하다. ‘南嶽’은 지리산(智異山)의 이칭이다.
宋翼弼(송익필, 1534~1599) :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서출(庶出)로 아우 한필(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으나 초시(初試)를 한 번 본 뒤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였고, 고양(高陽)의 구봉산(龜峯山) 밑에 크게 문호를 열어 후진들을 양성했다. 문하에서 김장생과 김집(金集), 정엽(鄭曄), 서성, 정홍명(鄭弘溟)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문집에 『구봉집』이 있다.
草衣人(초의인) : 풀 옷 입은 사람. 풀옷은 은자들이 입는 옷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三四(삼사) : 서넛, 서너 명.
於塵世外(어진세외) : 티끌 세상 밖에서. 티끌 세상은 속세(俗世)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遊(유) : 노닐다, 유람하다.
洞深(동심) : 골짝이 깊다. / 花意懶(화의나) : 꽃 필 뜻이 게으르다. 꽃이 피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을 시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山疊(산첩) : 산이 첩첩하다, 산이 겹쳐지다. / 水聲幽(수성유) : 물소리가 그윽하다.
短嶽(단악) : 작은 산, <키가> 낮은 산. / 盃中畵(배중화) : 술잔 속의 그림.
長風(장풍) : 긴 바람,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 袖裏秋(수리추) : 소매 속의 가을.
白雲(백운) : 흰 구름. / 巖下(암하) : 바위 아래. / 起(기) : 일어나다.
歸路(귀로) : 돌아가는 길, 돌아가는 길에. / 駕靑牛(가청우) : 푸른 소를 타다. ‘푸른 소’는 털빛이 검푸른 소를 가리키는데 노자(老子)가 탔다는 데서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소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백(李白)의 시에서, “꽃이 따사로우니 푸른 소가 누웠고, 소나무가 우뚝하니 흰 학이 잠들었네.[花暖靑牛臥 松高白鶴眠]”라고 하였다.[번역]
지리산 유람

풀 옷 입은 사람 서넛이
티끌 세상 밖에서 노닐 적에
골짝은 깊어 꽃 필 뜻 게으르고
산 첩첩하여 물소리 그윽하여라
작은 산은 술잔 속의 그림,
긴 바람은 소매 안의 가을!
흰 구름이 바위 아래서 이나니
돌아가는 길엔 푸른 소 타리라

[한역노트]
이 시의 주된 소재는 산, 구체적으로는 지리산(智異山)이다. 그러나 원시(元詩) 8구 가운데 그 어떤 구절도 지리산을 특정하는 내용으로 보기는 어려우므로 이 시의 제목은 단순화시켜 ‘遊山(유산)’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遊山’은 산을 유람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보자면 이 시의 주제는 한 마디로 산을 유람하는 즐거움, 곧 ‘遊山之樂(유산지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청대(淸代)에 의원(醫員)으로 제법 이름이 있었던 서대춘(徐大椿)이라는 사람이 지은 시가(詩歌) 가운데 「유산락(遊山樂)」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의 제목이 역자가 오늘 소개한 시의 주제인 ‘유산지락’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유산락」의 시구(詩句) 일부가 「유남악」의 지향(指向)과 상당할 정도로 겹쳐진다는 사실이다.

到山中(도산중) 산속에 들어가면
便是仙(변시선) 바로 신선이라네

「유산락」의 첫머리에 보이는 이 구절은 기실 옛 사람들이 산행(山行)을 한 목적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신선이라는 뜻의 한자 ‘仙’을 ‘산에 사는 사람’이라는 말로 간단히 풀이하기도 하므로, ‘사람이 산속에 들어가면 바로 신선’이라고 여기는 관념을 서대춘의 독창으로 여길 수는 없다. 옛 사람들이 산행, 곧 산악 유람을 신선이 되어 노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오히려 보편적이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옛 사람들에게는 꼭 산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거나, 여러 봉우리를 다 밟아보아야 한다거나, 산행을 통해 무슨 심신을 단련해야 한다고 여기는 관념 같은 것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이 시를 통해 그런 측면을 한번 따져보기로 하자.「유남악」의 제5와 제6구는 산 중턱 어디쯤에서 가볍게 술자리를 열었을 때의 주변 풍경과 시인의 기분을 시화(詩化)시킨 것이다. 키가 낮은 산봉(山峯)이 술잔에 그림처럼 비친 것으로 묘사했으니, 산의 정상까지는 올라가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맛본, 소매 속까지 스며드는 시원한 바람을 통해 마치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7구에서 흰 구름이 바위 아래서 인다고 하였으니, 시인 일행이 술을 마신 곳이 산의 정상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높은 곳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지대가 어지간히 높은 곳이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산을 오를 때는 돌아오는 여정을 미리 염두에 두어야 했기 때문에 무작정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산에 올라가는 것을 티끌 세상, 곧 속세(俗世)의 바깥에서 노니는 것으로 여긴 시인의 인식대로라면, 산을 내려오는 것은 곧 속세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도 ‘시인이 돌아가는 길에 푸른 소를 타겠다’고 한 것은 산에서 체험한 신선의 삶을 속세에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이해된다. 말하자면 속세에서도 신선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속세에서 누릴 수 있는 신선의 삶을 유추하게 하는 시어는 바로 제1구 첫머리에서 언급된 ‘풀옷[草衣]’이다. 이 풀옷은 은자(隱者)를 상징하는 옷이면서 동시에, 신선이 된 노자(老子)가 탔다고 전해지는 ‘푸른 소[靑牛]’와 짝을 이루는 소품이 되기도 한다. 푸른 소에게는 고관대작의 비단옷이 아니라 은자의 풀옷이 더 어울리는 법이다.

옛날 시인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 가운데도 산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산에 기대어 사는 사람이든, 산을 멀리서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든 언제나 묵묵히 그 자리에 있기 마련인 산을 딱히 싫어할 이유가 없다. 어쩌다가 산을 찾는 사람 역시 그 산에 대한 호감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역자는 지리산을 찾아본 적이 그 언제였던가 손꼽으며 세어보다가 금세 포기하고 말았다. 10년이 넘도록 가보지 못한 산은 10년이 넘도록 펼쳐보지 못한 책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의 제목에 쓰인 남악(南嶽)은 지리산의 이칭이다. 중국의 영향으로 동아시아 각국이 자국에 존재하는 다섯 개의 명산을 가리키는 말로 오악(五岳)을 사용하게 된 것은 그 역사가 자못 오래된 듯하다. 고려와 조선의 오악은 물론 신라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의 오악도 따로 언급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친숙한 오악은 백두산을 북악으로, 지리산을 남악으로, 묘향산을 서악으로, 금강산을 동악으로, 그리고 북한산을 중악으로 여기는 대한제국 때의 오악인 듯하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지리산은 통일신라 시대와 조선시대에 이어 대한제국 때에도 남악으로 일컬어졌으니 남북한을 통틀어 명산으로 일컬어진 역사가 어쩌면 가장 오래된 산이 아닐까 싶다.

오늘 소개한 이 시는 오언율시(五言律詩)로 압운자가 ‘遊(유)’, ‘幽(유)’, ‘秋(추)’, ‘牛(우)’이다.

【여적(餘滴)】
이 시는 『구봉집(龜峯集)』 권2에 「유남악(遊南嶽)」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지만, 그 외에도 『송강집(松江集)』 별집 권1에는 「유남악연구(遊南嶽聯句)」라는 제목으로, 『백록유고(白麓遺稿)』 습유에는 「대은암연구(大隱巖聯句)」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송강집』에서는 1·2구는 송익필이, 3·4구는 이이(李珥)가, 5·6구는 정철(鄭澈)이, 7·8구는 성혼(成渾)이 읊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3·4구는 이이의 문집에 보이지 않고, 7·8구는 성혼의 문집에 보이지 않는다. 『백록유고』에서는 1·2구는 이산해(李山海)가, 3·4구는 신응시(辛應時)가, 5·6구는 송익필이, 7·8구는 고경명(高敬命)이 읊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산해와 고경명의 시문집에는 해당 시구가 보이지 않는다.

2024. 7. 30.<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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