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제자리에 앉게 되는 날을 기다리며

[arte] 김기태의 처음 책 이야기
법정(法頂) 수상집(隨想集) , 샘터사, 1978년 5월 1일 발행

방황하고 절망하는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위로하는 심정으로 쓴
법정(法頂) 스님의 글 모음집

사회적 불안이 깊은 요즘,
인간 본연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법정의 책들
여러 계층에서 제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참으로 혼란스러운 시절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극과 극이 대립하는 혼돈의 시절이다. 빈부의 격차를 넘어 지식과 정보의 격차도 심각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는 예측 불가의 시절이다. 이런 때에 이미 오래전 시대를 위로한 책이 있었다. <서 있는 사람들>, 이 책은 평생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법정(法頂) 스님의 <영혼의 모음>(1973, 동서문화사), <무소유>(1976, 범우사)에 이어 출간된 세 번째 수필집이다. 마땅히 자리를 잡고 자기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 제자리에 앉지 못한 채 방황하고 절망하는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그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는 심정으로 쓴 글들을 모았다.
197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당시 억압적 상황과 급격한 산업화가 불러온 자연 파괴와 인간성 상실에 관한 법정 스님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비겁한 지식인의 허상을 꾸짖는 한편, 불신과 물질만능주의가 판치는 세상과 부도덕한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스님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종교인이면서도 이념과 현실을 뛰어넘어 부조리한 사회를 향해 올바른 길을 가리키는 스님의 죽비소리는 동시에 진정한 구도자로서의 길이 무엇인지 일러준다.

법정 스님은 서문으로서의 ‘책머리에’라는 글에서 이 책의 제목을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붙인 이유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먼저 소개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캘린더를 걸어둘 벽이 없다
꿇어앉아 마주 대할 상(像)이 없다
계절(季節)이 와도 씨를 뿌리지 못한다
남의 집 처마 끝에서
지도(地圖)가 붙은 수첩(手帖)을 꺼내 들고
다음날 하늘 표정(表情)에 귀를 모은다
그들은 구름조각에 눈을 파느라고
지상(地上)의 언약(言約)을 익혀두지 못했다
그들은 뒤늦게 닿은 사람이 아니라
너무 일찍 와버린 길손이다
그래서 입석자(立席者)는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먼 길의 나그네다

곧 “이 잡문집(雜文集)의 이름을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붙인 것은 그런 선량한 이웃들을 생각해서다. 그들이 저마다 제자리에 앉게 되는 날, 우리 겨레도 잃었던 건강을 되찾게 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40여 년의 세월을 넘어오는 동안 외형적으로는 비교 불가의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지만 사회 구석구석 숨어 있는 억압이나 불평등, 디지털 피로감이 쌓이면서 등장한 소외감과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팬데믹(pandemic) 이후 깊어진 사회적 불안이 가시지 않고 있는 요즈음에 읽어봐도 스님의 청정한 목소리는 여전히 인간 본연의 가치를 일깨워주기에 손색이 없다.

1978년 5월 1일 발행된 <서 있는 사람들> 초판 1쇄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Ⅰ. 山居集
숲에서 배운다·부엌訓·佛日庵의 편지·直立步行·차나 마시고 가게·沈默의 눈·해도 너무들 한다·도둑과 禪·바닷가에서·서울은 순대속·모기 이야기·옛 절터에서·日日是好日·빈뜰·소리 없는 소리·多禪一味Ⅱ. 毒感時代
無關心·小窓多明·外貨도 좋지만·90度의 호소·파장·우리 時代를 醜하게 하는 것들·제비꽃은 제비꽃답게·그 눈매들·混沌의 늪에서

Ⅲ. 茶來軒 閑談
나무 아래 서면·知識의 限界·눈과 마음·일에서 理致를·모두가 혼자·가을이 오는 소리·말없는 言約·책에 눈멀다·執行하는 겁니까?·水墨빛 봄·施物·山을 그린다·최대의 供養·잦은 삭발

Ⅳ. 悲
佛敎의 救援觀·護國佛敎·벽돌을 갈아 거울을·佛敎의 經濟倫理·절은 修道場이다·悲Ⅴ. 出世間
出家·無功德·賢者의 對話·禪問答·趙州禪師·나무에 움이 튼다·마하트마 간디의 宗敎·너 어디 있느냐·入山하는 후배에게·이 한 권의 책을·現前面目·시들지 않는 꽃·淸白家風·그들을 찾기 위해·僧團과 통솔자·삭발 本寺·三寶淨財·중노릇이 어렵다

초판본 표지와 속표지를 보면 우리나라 추상화의 대가 이두식(李斗植, 1947~2013) 화백의 그림을 바탕에 두고 세로글씨 활자체로 오른쪽에서부터 발행처로서의 ‘샘터社刊’, 저자 표시로서의 ‘法頂 隨想集’, 그리고 책 제목 ‘서 있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크기로 나타나 있다. 앞표지 날개에는 법정 스님의 초상을 담은, 사진작가 주명덕(朱明德)이 찍은 흑백사진과 함께 스님의 간단한 약력이 기재되어 있다.
법정(法頂) 수상집(隨想集) &lt;서 있는 사람들&gt; [위]앞·속표지, [아래]앞표지 날개 / 사진. ©김기태
간기면(刊記面)을 보면 아직도 붉은빛 선명한 인지(印紙)가 붙어 있고, 정가는 1,200원, 발행인은 샘터사의 설립자인 김재순(金在淳), 발행소는 ‘사단법인 샘터사 출판부’로 표기되어 있다. 뒤표지는 스님이 산길을 걸어가는 뒷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이 처연하게 전체를 덮고 있으며, 오른쪽 윗부분에 세로글씨로 “열린 귀는 들으리라/한때 무성하던 것이 저버리고 만/텅 빈 들녘에서 끝없이 밀려드는/소리없는 소리를”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법정(法頂) 수상집(隨想集) &lt;서 있는 사람들&gt; 간기면과 뒷표지 / 사진. ©김기태

법정 스님의 생애와 남다른 인연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라남도 해남(海南)에서 태어났다. 속세에서 부르던 이름은 박재철(朴在喆)이다. 스님은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청춘의 시점에서 6·25 전쟁을 겪으면서 이러저러한 고뇌 끝에 당시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전남대 상대를 중퇴한다. 그리고 1955년 통영 미래사(彌來寺)에서 당대의 고승 효봉(曉峰) 스님의 제자로 불교에 입문하고, 사미계(沙彌戒)*를 받음으로써 출가하게 된다. 1959년 3월에 통도사(通度寺)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승려 자운(慈雲)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같은 해 4월 해인사(海印寺) 강원(講院)***에서 명봉(明峰) 스님의 가르침 아래 대교과(大敎科)를 졸업하였다.

그 후로 스님은 쌍계사(雙溪寺), 해인사, 송광사(松廣寺) 등의 선원에서 수행에 들어갔다. 수행을 마친 후 스님은 서울 봉은사(奉恩寺) 다래헌(茶來軒)에 머물면서 운허(耘虛) 스님과 함께 불교 경전 번역 일을 하던 중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장준하(張俊河, 1918~1975) 등과 함께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법정스님 / 사진출처. 한경DB
<무소유>로 대표되는 스님의 글을 읽노라면 종교적 색채가 짙은 순수한 수필만 썼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970년대 불교계 인사들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나선 종교인이기도 했다. 또한 송광사에 ‘선수련회’를 만들어 산사(山寺)의 수행법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일에도 앞장섰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템플 스테이’로 발전하게 된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70년대 후반에는 송광사 뒷산에 직접 암자 불일암(佛日庵)을 짓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 홀로 지냈다. 시간이 흘러 법정 스님이 머무는 불일암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홀로 지내기가 어려워지자 스님은 1992년 또다시 출가하는 심정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오지의 산골 오두막에서 혼자 지내기 시작했다.

또한, 법정 스님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애절한 사연이 깃든 ‘길상사(吉祥寺)’이다. 길상사는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이 처음 출가했던 전남 송광사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 / 사진출처. 길상사 홈페이지
길상사가 자리 잡은 곳은 본래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 있었는데, 그 요정의 주인이었던 김영한[1916~1999, 법명 길상화(吉祥華)]이 당시 가격으로 1천억 원이 넘는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사찰이 된 것이다. 김영한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인 백석(白石)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는, ‘김자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인물이었다. 어려서 기생이 된 그녀는 스물두 살 무렵 백석 시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자 백석은 만주로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남한에 정착한 김영한은 뛰어난 사업 수완을 통해 대원각을 고급 요정으로 꾸몄고, 내로라하는 정치가와 기업인들이 드나드는 명소로 키웠다. 이후 요정 사업을 그만둔 김영한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는데, 1987년 즈음에 우연히 미국 LA에서 법정 스님의 설법을 듣고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고, 소유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김영한 / 사진출처. 한경DB
그리하여 김영한은 대원각을 스님에게 시주하려고 했지만, 무소유를 철칙으로 여기는 법정 스님은 김영한의 제안을 거절했고, 간청과 거절을 거의 10여년 넘게 반복하다가 결국 1995년에야 김영한의 뜻을 스님이 받아들여 ‘길상사’를 세웠고, 스님은 김영한에게는 ‘길상화’라는 법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당시 김영한은 1천억 원이 넘는 경제적 가치를 가진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면서 “그깟 천억 원,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법정스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그리고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

발간 25주년 기념 <무소유> 개정판 표지를 감싸고 있는 띠지에 새겨진 김수환 추기경의 추천사다. 여기에 덧붙여 윤구병 선생은 “무소유는 공동 소유의 다른 이름이다.”라면서 “나무 한 그루 베어 내어 아깝지 않은 책”이라고 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기도 했다. 무엇이 그토록 법정 스님의 글을 감동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한마디로 그것은 ‘꾸밈없음’ 그리하여 ‘욕심 또한 없음’이 물씬 풍기는 까닭이리라.

미사여구(美辭麗句)로써 넘치게 하지 않고,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지도 않으며,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는 차분한 문체건만, 다 읽고 나면 가슴 쓸어내리며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 그런 힘이 스님의 글 속, 책갈피마다 흥건하게 배어 있는 까닭이리라. 광신(狂信)과 맹신(盲信)이 도처에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종교사회에서조차 스님의 글은 모든 영역을 초월하여 읽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의 참스승이 전하는 경전(經典)과도 같은 ‘말씀’일 수도 있겠다.
발간 25주년 기념 『무소유』 개정판 표지 / 사진출처. 교보문고 홈페이지
그런데 하마터면 그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 뻔했다. 책으로나마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으면 좋으련만, 이마저도 스님은 냉정하게(?) 거두어들였으니 말이다.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입적한 법정 스님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한다.”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끝내 ‘무소유’의 삶을 굳게 지켰다.

하지만 당신의 무소유 정신이 오히려 살아남은 자들의 소유욕을 자극한 것일까. 스님의 이름으로 발표한 모든 책을 절판해달라는 유언이 알려진 뒤 법정 스님의 책들은 ‘광풍’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큰 인기를 누렸으니 말이다. 스님의 이름이 새겨진 모든 책들이 한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을 뒤덮을 정도였으니…….

어쨌든 스님이 입적하신 후에 공표된 유언(남기는 말)은 우선 당신이 남긴 모든 것을 거두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세상을 향한 스님의 ‘남기는 말’은 다음과 같다.

◇ 남기는 말
1.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2.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
3.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2010년 2월 24일 법정 속명 박재철
평소 스님의 뜻을 받들어 ‘향기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가 저작재산권 상속인으로 지정된 것 또한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유언하는 바람에, 이미 정식 출판계약을 통해 책을 내고 있던 상당수 출판사로서는 일방적인 계약 파기 상황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는 여론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고 만 터였다.

책을 보내달라는 서점과 독자들의 요구는 빗발치는데, 정작 스님은 가시면서 책을 풀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런 사정을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지 막막했을 출판계로서는 그나마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상속인으로 지정해준 스님의 처사가 엎친 데 덮친 격을 피할 수 있는 방편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스님이 떠나신 지도 10여 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말빚’조차도 싫다 하시며 마지막 가시는 길에 자신의 책들을 절판시켜달라고 부탁했던 법정 스님. 이처럼 법정 스님이 삶 속에서 실천한 무소유의 향기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법정 스님의 그늘은 특정 종교의 영역을 넘어 넓고 깊었다. 2010년 8월,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등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종교인 16명이 쓴 추모집 <맑고 아름다운 향기>가 출간된 것을 비롯하여 법정 스님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개신교계의 어느 성직자는 “한국 교회의 대형화와 세속화에 대한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시점에 ‘말빚마저 거두라’는 한마디로 상징되는 스님의 삶은 개신교계에 큰 부끄러움을 안겨줬고 스스로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스님을 추모했는가 하면, 생전에 거리낌 없이 교분을 나누었던 김수환 추기경과의 친분이 말해주는 것처럼, “스님이 생전 이웃 종교인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눠 가까운 목사나 신부, 수녀님이 많았으며, 가톨릭 내부에서도 그분의 삶에 공감하는 분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 그대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수환 추기경은 법정 스님보다 1년여 앞선 2009년 2월 16일 선종하고 말았으며, 그 뒤를 따라 법정 스님 또한 홀연히 먼 길을 떠났다.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헤쳐 나오며 정신적 지도자로 솔선수범한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은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승을 건너가셨다. 아니, 육신은 비록 떠났을망정 그 우렁우렁한 목소리 형형한 눈빛은 오롯이 남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리라 믿는다.
김수환 추기경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면서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라고 했던 스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우리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남을 것임을 믿는다. 끝으로, <서 있는 사람들> 초판본 맨 마지막에 실려 있는 '중노릇이 어렵다'라는 글의 마무리 부분을 읽어본다. 그리고 아직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보내며, 다시 한번 스님의 청아한 모습과 청빈한 삶을 기려 본다.
……
수행승의 본질적인 사명은 무명(無明)의 바다와 비리(非理)의 늪에서 시시각각 침몰해가고 있는 끝없는 이웃들을 건져내는 일이다. 그것은 공양(供養)의 대가로서 주어진 의무이기도 하다. 이런 의무를 등질 때 우리는 복전(福田)과 승보(僧寶) 대신 ‘놀고먹는 중놈들’ 소리를 면할 길이 없다. 어디 한번 다 같이 자문(自問)해보자. 오늘 우리들은 이 시대와 사회를 위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아아, 갈수록 중노릇이 어렵고 어렵네.
김기태 '처음책방' 설립자
* 사미계(沙彌戒): 출가는 하였지만 아직 스님이 되지 않은 남자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계율.
** 금강계단(金剛戒壇): 불가에서 금강계단은 승려가 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수계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 강원(講院): 4년 과정으로 마련된 강원은 사미과(沙彌科), 사집과(四集科), 사교과(四敎科), 대교과(大敎科) 등으로 4단계로 구성된다. 사미과는 다음 단계인 사집과의 예비단계이며, 사집과는 경전을 볼 수 있는 기초지식의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단계다. 사교과는 대승불교의 주요한 네 가지 경전인 능엄경(楞嚴經)·기신론(起信論)·금강경(金剛經)·원각경(圓覺經) 등을 공부하는 단계이며, 대교과는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손꼽히고 있는 화엄경(華嚴經)과 선(禪)에 대한 주요문헌을 공부하는 단계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