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투표 종료 후 6시간여 만에서야 발표…서방 언론 출구조사와 '딴판' '압승 기대' 민주 야권·국제사회 반발…부정선거 논란 속 '시계제로' 대혼란 美 국무 "국민 의지 반영되지 않은 선거 결과 발표 우려"
국제사회의 높은 관심 속에 치러진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에서 니콜라스 마두로(61) 대통령이 3선에 성공했다고 베네수엘라 선관위가 발표했다. 그러나 야당 측에서는 야권 후보가 이겼다고 자체 선언, 부정선거 의혹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거센 후폭풍이 부는 등 극심한 혼돈 상태가 빚어지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엘비스 아모로소 베네수엘라 선거관리위원장은 28일(현지시간) 공식 투표가 종료되고 6시간 가량 지난 29일 0시 10분께 "80% 개표가 진행된 가운데 마두로 대통령이 51.2%의 득표율로 1위를 기록했다"며 "2위 후보와의 득표율 차이를 볼 때 마두로 대통령 당선은 불가역적 추이"라며 당선 사실을 공식화했다. 중도 보수 성향 민주야권의 에드문도 곤살레스 우루티아(74) 후보는 44.2%의 득표율을 보였다고 아모로소 위원장은 덧붙였다.
마두로 대통령은 "베네수엘라 국민과 세계에 나 니콜라스 마두로 모로스가 베네수엘라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재선됐다고 말할 수 있다"며 "평화와 안정 그리고 정의가 있을 것이며, 법을 존중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몇시간 후 야당은 실시간 개표 결과를 공개하지 않은 선관위를 비판하며 자체 후보의 승리를 주장했다. 곤살레스 후보는 "베네수엘라 국민과 전 세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고 선관위를 겨냥했다.
곤살레스 후보를 적극 지원한 야권 지도자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56)도 40% 개표가 진행된 상태에서 받아본 결과, 곤살레스 후보의 압도적인 승리라고 주장했다.
로이터통신은 부정한 술수와 폭력 사태로 얼룩졌던 이번 베네수엘라 대선에서 마두로 대통령과 라이벌 곤살레스 후보가 각각 승리를 주장했다고 전했다. 외국 지도자들도 베네수엘라 선관위의 결과 발표에 의구심을 숨기지 않았다.
일본을 방문 중인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도 "베네수엘라 국민의 투표 결과와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선거 결과 발표를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좌파 출신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도 "마두로 정권은 스스로 발표한 결과가 믿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확인 불가능한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친(親)여당 성향의 베네수엘라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 후 실시간 개표 상황을 공개하지 않았고 개표 참관을 원하는 시민 그룹을 차단하면서 야권 및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아왔다.
이처럼 투명하지 못한 개표를 둘러싼 논란에 야권 후보의 자체 승리 선언까지 이어지면서 이번 대선을 둘러싸고 향후 엄청난 혼란이 빚어질 것으로 보인다.
2013년 처음 대권을 잡은 마두로 대통령은 선거 승리가 확정되면 내년부터 2031년까지 6년 더 베네수엘라를 이끌 수 있다.
임기를 마치면 무려 18년간 장기 집권하게 되는 셈이다.
6년간의 새 임기는 내년 1월 10일 시작된다.
베네수엘라는 1999년 우고 차베스(1954∼2013) 전 대통령 이후 30년 넘게 좌파 통합사회주의당(PSUV) 일당 '차비스모' 체제가 유지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차비스모는 차베스 전 대통령 이름에서 유래한 용어로, 일반적으로 중앙집권적 민족주의 포퓰리즘 성향의 사회주의를 통칭한다.
최근 잠잠해지는 듯하던 역내 온건 좌파 정부 출범 물결(핑크 타이드)에 다시 탄력이 붙는 계기가 될지도 주목된다.
역내에서는 멕시코, 페루, 콜롬비아, 볼리비아, 칠레, 브라질, 과테말라 민심이 수년 새 잇따라 '좌향좌'를 선택하면서, 중남미 블록 대외 노선의 무게추가 왼쪽으로 확 기울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르헨티나에서 극우 계열로 분류되는 정부가 들어선 데 이어 파라과이,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파나마에도 중도 보수 성향 지도자가 국정 운영을 이어가면서 이념 지형도의 균형을 맞춰가는 상황이었다.
베네수엘라 현대 정치사 '좌파 거물'인 차베스 전 대통령의 생일날 치러진 이번 대선을 앞두고 마두로 대통령은 유세에서 미국의 제재 극복을 통한 경제 활성화, 정유 시설 현대화, 주변국 좌파 정권과의 연대 강화, 가이아나와 분쟁 중인 영토에 대한 자주권 회복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는 중남미 대표적인 반미(反美)주의자로, 최근 수년간 이어진 경제난의 주요 원인을 미국 탓으로 돌리고 있다.
미국은 민주주의 훼손과 인권탄압 등을 이유로 베네수엘라 석유·가스 산업 등에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대선 결과를 놓고 중도 보수 성향의 민주 야권 측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면서 마두로의 3선이 순항할지는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베네수엘라 일간 엘나시오날은 "투표 후 곳곳에서 민주 야권 측 시민 그룹이 투표함 봉인과 개표 등 검증을 살피기 위해 개표장소에 입장할 것을 요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며 "물리적인 충돌과 (선관위 측) 폭언도 보고됐다"고 보도했다.
2014년 10월부터 10년째 국방부 장관을 맡고 있는 '마두로 최측근' 블라디미르 파드리노 로페스는 앞서 이날 투표가 진행 중인 시점에 현지 취재진에 "선거 관련 모든 자료와 인프라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지점마다 장병을 배치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언급 한 바 있다.
선관위가 발표한 결과는 서방 언론의 출구조사 결과와도 상반된다.
앞서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이번 대선 출구조사에서 곤살레스 후보가 65%의 예상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에 비해 마두로 대통령의 예상 득표율은 31%에 그쳤다.
서방 언론은 선거 과정에서도 곤살레스 후보의 낙승을 점친 바 있다.
피선거권 박탈 이후 곤살레스 후보와 함께 세몰이 선봉에 섰던 '베네수엘라 철의 여인' 마차도는 투표 종료 후 1시간여 뒤 선거 캠프를 찾아 "국민 여러분께서는 투표소에서 철야하며 개표 과정을 지켜봐 달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결국 마차도의 '불안한 예상'이 현실화하면서 경우에 따라선 야권 지지자를 중심으로 한 선거 불복 운동이나 주민들의 국외 이탈 등의 사태도 벌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