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 소형차 4CV와 고성능 알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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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확대경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5월, 르노자동차의 창업자 루이 르노는 회사 내 엔지니어 몇 명이 소형차 개발의 필요성을 제기하자 반대했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이 워낙 강력하게 목소리를 높이자 결국 ‘106E’라는 코드를 만들어 승인했다. 르노의 국민차 4CV(사진)의 개발 코드명이다. 기쁨도 잠시, 그해 르노 공장이 독일군에 점령당했고 독일은 르노의 생산 제품을 군수용으로 한정했다.
그러자 르노 내부에 일종의 자동차 비밀결사대가 결성됐다. 106E 프로젝트를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책임자급 몇 명이 몰래 개발을 진행했다. 르노의 총괄 책임자는 다임러 벤츠에서 근무했던 독일인 빌헬름 폰 우라흐였지만 그는 르노 사람들의 소형 승용차 개발을 까맣게 몰랐다. 르노의 기술책임자였던 페르낭 피카르가 완벽히 그를 속였기 때문이다.페르낭은 분명 전쟁은 끝날 것이고 피폐해진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국민차가 필요할 것으로 확신했다. 그리고 페르낭 생각에 적극 동참한 인물이 르노에 평생 몸을 담았던 엔지니어 샤를 에드몽 세르다. 하지만 자동차를 개발한다는 것은 막대한 비용 지출이 수반되기에 결국 106E 프로젝트를 알게 된 빌헬름은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106E 코드가 다시 언급된 것은 전쟁이 끝난 1945년 11월이다. 프랑스 정부는 독일의 자동차 선구자였던 포르쉐 박사를 불러 프랑스 재건 계획으로 르노 106E 개발의 완성을 요청했다. 그해 12월, 포르쉐는 르노 엔지니어를 초청해 비틀의 설계 등을 참고하도록 했지만 르노가 국영화되고 새로운 책임자로 임명된 독일 저항의 영웅인 피에르 르파쉐는 이 같은 사실에 분노했다. 프랑스의 국민차가 적국이었던 독일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독일 저항파였던 르파쉐는 독일차에도 강력한 저항력을 보이며 106E 생산을 지연시켰다.
결국 4CV는 우여곡절 끝에 1946년 파리모터쇼에 공개됐다. 프로토타입 초기에는 폭스바겐 비틀을 닮았지만 수차례 설계와 디자인이 변경돼 등장할 때는 프랑스 감성이 듬뿍 담겼다. 참고로 ‘CV’는 ‘세금 마력’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슈브 베페(chevaux-vapeur)’의 앞글자를 딴 이름이다. 당시 영국, 벨기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유럽 국가는 자동차에 과세할 때 ‘마력’을 기준 삼았다. 따라서 4CV는 ‘4마력에 세금이 부과된 경제적인 차’라는 의미다.이후 1950년 7월, 4CV를 특별히 주목했던 사람은 젊은 자동차 사업가 장 르델이다. 미군이 남긴 GMC와 닷지 등을 개조해 팔다가 프랑스 디에프 지역의 르노 대리점을 열었다. 4CV의 성능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손재주를 살려 고성능 튜닝 버전을 완성했다. 곧바로 자동차경주에 참여해 국내 경쟁사인 푸조를 뛰어넘고 1954년에는 아예 ‘알핀(Alpine)’ 브랜드를 만들고 ‘A106’이라는 4CV 기반 튜닝차를 선보였다.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알핀은 르노의 고성능 튜닝 브랜드로 유명세를 탔지만, 오일쇼크 등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르노 품에 안겼다. 그러나 르노 또한 알핀을 제대로 부활시키지 못했다. 독일 및 이탈리아 고성능 대비 인지도가 낮았던 탓이다.
르노의 생각이 달라진 시점은 2021년이다. 벤츠 ‘AMG’, BMW ‘M’, 그리고 현대차 고성능 브랜드 ‘N’ 등이 자꾸 성장하자 다시 ‘알핀’ 카드를 꺼내들고 A110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에서도 르노의 고성능으로 A110을 판매한다. 물론 한국에서 알핀이 통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고성능일수록 브랜드 인지도가 중요하니 말이다.
권용주 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