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그들의 취향을 존중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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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조원진의 공간의 감각커피는 오렌지가 아니다. 호두나 아몬드도, 초콜릿이나 자스민도 아니다. 하지만 커핑테이블 앞에서 사람들은 심심치 않게 과일과 허브, 견과류 등의 이름을 이용해 그 맛을 표현한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단어들 같지만, 커피의 가치를 평가하는 이 방식은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커피를 맛보는 일련의 과정을 일컫는 ‘커핑’의 역사는 1922년에 윌리엄 우커스에 의해 처음으로 기록됐다. 초창기의 커핑은 무역업자 간의 원활한 거래를 위한 느슨하고 원초적인 가치평가에 불과했다.커핑을 통한 가치평가 체계가 고도화된 것은 1984년으로, 전미스페셜티커피협회(SCAA, Specialty Coffee Association of American) 회장이었던 테드 링글이 센서리 과학을 적용해 커피 커퍼스 핸드북(Coffee Cupper’s Handbook)을 발간한 것에서 출발한다. 이 이론을 기반으로 1990년대 말에는 커피 향미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나열한 커피 플레이버 휠(Coffee Taster’s Flavor Wheel)이 등장했다. 이어 2004년에는 커피 평가 양식이 완성됐고, 커피 등급 감별 자격증인 큐 그레이더(Q-grader) 발급이나, 각종 커피 옥션의 가치 평가 등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구축되고 훈련된 전문가들이 등장하자 커피의 맛을 평가하는 일종의 프로토콜이 생겼다. 커피가 오렌지가 되고 자스민이 되고 또 아몬드나 초콜릿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주관적인 감각의 영역을 객관적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그렇다면 커피 가치평가 체계를 정립하고자 했던 수십 년의 이 노력은 사람들이 느끼는 개별적인 입맛을 통일시키고 객관적인 평가 기준을 마련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SCA (Specialty Coffee Association)는 기존의 평가시스템이 커피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문화권마다 선호하는 맛과 향이 미묘하게 달랐고, 커핑의 목적이나 환경에 따라 조율할 수 없는 편차가 생기기도 했다. 그리하여 SCA가 2023년 발표한 새로운 가치평가 체계 CVA (Coffee Value Assessment)는 기존의 제한적인 평가방식에서 벗어나서, 개인이나 집단의 취향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택했다. 커피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남겨두되, 그 기록에 대한 개인의 평가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망원동 카페 커퍼시티
스페셜티 커피는 농장의 씨앗부터 한 잔의 커피까지 모든 제조과정이 투명해야 한다는 ‘추적 가능성’과 그 모든 과정에 전문가들이 개입해야 한다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스페셜티 커피 산업은 커피 재배부터 가공, 운송, 로스팅과 추출까지의 모든 과정에 표준을 만들고 체계를 정립하는 데 힘을 써왔다. 커피 가치평가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도, 산업의 정체성을 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스페셜티 커피 산업은 더 많은 이들을 산업에 끌어들여야 했다. 이 노력의 과정으로 스페셜티 커피를 다루는 일선 카페들과 그곳의 바리스타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의 취향의 귀를 기울였다. 나는 이 커피에서 오렌지 맛을 느끼지만, 당신이 느끼는 어떤 맛과 향도 틀린 것은 없다고. 그리고 그 취향을 존중해 나는 또 한 잔의 커피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해가 자오선을 넘어 느긋한 오후가 되면, 이차선 도로를 따라 들어선 상가들에 빛이 들기 시작한다. 카페 커퍼시티는 그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쇼윈도 형태의 파사드(Façade, 건물의 입면)가 있는 길쭉한 상가에 자리 잡았다. 문을 열고 공간에 들어서면 긴 파사드만큼이나 긴 테이블을 마주하게 된다. 햇볕은 오후가 되기 시작하면 이 테이블을 고루고루 비춘다. 바리스타 변상헌은 테이블을 둘러싼 손님들을 마주하며 커피가 이 테이블에 오기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가치평가에 익숙한 전문 커피인부터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초심자에게도 눈높이에 맞춘 대화가 이어진다. 그렇게 주문한 커피가 한 잔, 새로운 맛과 향이 궁금한 이들에게 또 한 잔, 그런데 이 커피도 드셔보면 좋을 것 같다고 한 잔, 잔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운다.커퍼시티는 영국인들의 사회적 방언에서 영감을 얻어 지은 이름이다. “팬시 어 카파(Fancy a Cuppa?)”는 “차(혹은 커피) 한잔할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한 잔이 가득한 도시가 바로 이곳, 커퍼시티다. 변상헌은 갓 스무 살이 넘어 입사한 회사에서 5년 동안 일하면서, 제대로 된 해외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문득 일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의 손에는 호주행 비행기표가 쥐어져 있었다.
그전까지는 무심코 마시던 커피 한 잔이 이렇게나 특별할 수가 있다고 느꼈던 것은 호주 여행을 하면서부터였다. 그곳에서 바리스타들은 그가 커피에 대해 얼마나 지식이 있는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 공간에서 내가 최선을 다해 준비한 음료를 마시러 온 것에 감사하고, 그의 취향에 귀를 기울였다. 때로는 다채로운 과실향이, 때로는 묵직한 다크 초콜릿의 질감이, 때로는 고소한 견과류의 향미가 커피에서 느껴졌다. 일로 가득했던 일상에는 취향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무엇인가에 이끌려 찾은 이곳 호주의 카페에서는 모두가 내 취향에 귀를 기울였다. 호주에서도 줄곧 “팬시 어 카파”라는 말이 들려왔다. 문득 누군가에게 커피 한 잔 묻는 일이 직업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주거 공간의 경우 남향이 가진 장점이 크지만, 상업 공간에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영업을 하는 주 시간대에 강하게 내리쬐는 직사광선이 성가시게 되는 경우가 있다. 북서향의 커퍼시티는 오픈 준비로 분주한 순간에는 서늘하게 그림자가 지다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기 시작하는 순간 길고 따뜻한 빛이 비춰와 오히려 남향보다 밝고 따뜻한 분위기를 만든다. 햇볕은 자리에 앉은 누구도 거르지 않고 평등하게 빛을 나누어준다. 그 빛이 퍼져나가는 모습은 마치 모든 이들의 취향을 존중해 커피를 내리는 변상헌 바리스타의 모습과 닮기도 했다.현대에 이르러 미학계에서는 취미판단의 기준을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형태가 근대적 권위주의에 기인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입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예술계의 특권을 비판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게 된 것인데, 예술을 평가하는 기존의 이론에도 현대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시대를 관통하는 아름다움의 유무를 따지는 일은 결코 쉽게 해결될 수 있지 않다. 하지만 특정인의 권위에 기대 그 감각이 옳다고 믿는 것 또한 마땅한 것은 아니다. 한 잔의 커피가 햇살처럼 퍼져 모두의 입과 코를 채우지만, 그것을 느끼는 서로의 감정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니 길게 늘어선 바를 따라 움직이는 변상헌 바리스타의 발걸음은 더욱 바빠지기만 한다. 더 많은 이들의 취향이 커퍼시티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조원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