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가에 클래식을 : 베네수엘라 '엘 시스테마'의 끝나지 않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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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정원의 글로 떠나는 중남미 여행더 많은 대중이 클래식을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의 노력과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클래식의 대중화를 넘어 음악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에 일조하려는 문화예술 프로그램과 운동을 볼 수 있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El Sistema)는 중남미의 대표적인 무상 음악교육 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의 음악계에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소외 계층을 위한 무상 음악 교육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El Sistema)의 기원
명성은 사라질지언정 그 시스템은 계속될 것
역사적으로 중남미의 많은 나라가 직면해 온 문제 중 하나가 빈부 격차와 불평등이다. 베네수엘라는 이 대륙에서 소득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에 속했다. 그렇지만 풍부한 매장량을 가진 석유를 비롯한 자원 수출을 기반으로 한 수입은 일반 국민에까지 미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소수의 부유층과 다수의 빈곤층이라는 이중적인 사회 구조가 고착되었다. 계층 간의 이동과 성공이 어려워지면서 젊은 세대들은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무기력해지거나, 사회에 대한 반감과 분노가 커져 범죄로 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엘 시스테마는 이렇게 사다리를 잃어버린 저소득층을 비롯한 소외 계층의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무상으로 음악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으로 그 역사는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처음 제안한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José Antonio Abreu)는 경제학자였다. 그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관현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으며, 작곡 및 지휘까지 하는 등 애호가 수준을 넘어선 전문적 음악인이기도 하였다. 베네수엘라의 경제적 불평등 완화에 고민하던 그는 음악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였다. 아브레우는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지만 음악이 가진자들만의 전유물이 돼서는 안된다고 믿었으며, 클래식을 소외된 계층에게 개방하자고 주장하였다.
아브레우는 두 가지 방향에서 자신의 신념을 현실로 옮기고자 하였다. 우선 클래식의 대중화였다. 그는 음악의 힘을 믿었다. 가난한 거리의 아이들이 음악을 배우고 악기를 경험하면서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범죄나 마약 등 어두운 경로로 빠지는 것에서 벗어나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것이라 기대했다. 다른 하나는 엘리트 음악교육의 개혁이다. 전문적 연주자가 되고자 하지만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꿈을 포기해야 하는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초기에는 지원자들을 모아 공장이나 지하 주차장, 성당 등에서 연습과 리허설을 하는 등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아브레우는 후원자들을 찾아다니며 재정적인 지원을 호소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청소년 관현악단이 구성되었으며, 1977년 스코틀랜드에서 이들이 참여한 공연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마침내 정부로부터 대규모의 재정지원을 받게 된다. 이후 여러 정부가 들어서지만 공적 차원의 후원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 보조금을 기반으로 현재의 무상 음악교육 시스템 ―‘엘 시스테마’는 스페인어로 시스템을 의미한다―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수도인 카라카스에서 시작된 프로그램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고, 지역마다 누클레오(nucleo)라는 음악 교육센터가 생겨났다. 이를 통해 각지에서 관현악단이 생겨났고, 음악을 가르칠 교사가 고용되었고, 연주를 위한 악기와 교보재 등이 보급되었다. 도난과 손상의 이유로 외부로의 반출은 불가하지만, 연주를 배우는 모두에게 악기가 무상으로 제공되었다. 명실상부하게 저소득층과 소외된 이들에게도 클래식의 문화를 개방한 사례였다. 현재까지 약 90만 명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이 프로그램의 수혜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엘 시스테마가 깜짝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노력을 통해 성장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엘 시스테마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21세기 들어서였으며, 이 시기는 우고 차베스의 집권기와 연결된다. 엘 시스테마는 여러 혜택에서 배제되었던 서민을 위한 미시온(Misión)이라는 각종 사회보장 정책을 추진하려는 차베스의 목표와 맞아떨어졌으며, 그는 이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을 대대적으로 확대하였다. 당시 공식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걸쳐 221개의 누클레오가 6천 명의 교사의 지도하에 운영되었다. 여기에서 악기를 배운 학생들은 156개의 어린이 관현악단과 145개의 청소년 관현악단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보다 규모가 작은 50여 개의 실내악 단체와 장애아동을 위한 특수 음악프로그램도 이와 연계되어 생겨났다. 차베스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클래식뿐 아니라 카리브 지역의 민속음악과 록(Rock) 등 대중음악 교육으로 음악의 장르와 형식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당시 20만 명 정도가 엘 시스테마 프로그램에 일원이 되었다. 음악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아브레우의 노력은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이들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유사한 사회적 문제를 지녔던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앞다투어 이 프로그램을 도입하였다. 미국에서도 ‘엘 시스테마 USA’가 설립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문체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이와 유사한 ‘꿈의 오케스트라’를 설립·지원하였다. 아브레우는 2010년 서울평화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엘 시스테마의 최우선적 목표가 전문 연주자 양성은 아니었다. 클래식의 세례를 받지 못하는 빈곤가정의 아이들에게는 ‘평평한 운동장’을, 한때 나쁜 길로 들어섰던 청소년들에게 다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갱생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하지만 이 가운데 보석과도 같은 연주자들이 나타났고,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이다. 다섯 살 때인 1986년에 엘 시스테마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웠고, 음악에 대한 열정과 천재성으로 이후 작곡과 지휘를 공부하였고, 이후 아브레우에게 사사를 하기도 하였다. 1999년에는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영웅의 이름에서 유래한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순회공연을 이끌며 실력을 쌓았다. 두다멜은 2004년 독일에서 열린 구스타보 말러 지휘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항상 그의 이름 옆에는 엘 시스테마가 언급되면서 이 프로그램의 위상은 함께 더 커졌다. 시몬 볼리바르 관현악단을 이끄는 지휘자가 된 그는 엘 시스테마의 상징이자 자랑이었다. 이후 두다멜은 베네수엘라를 넘어 해외에서의 활동을 병행한다. 독일의 빈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지휘하였으며, 2009년부터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여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와 15년 동안의 활동을 마치게 되는 그는 2026년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내정되었다. 영화음악가 존 윌리엄스와 협연하여 ‘스타워즈’ 시리즈의 음악 일부를 지휘하는 등 대중적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2013년 차베스의 장례식에서는 음악 연출을 담당하는 등 세계적인 음악가인 동시에 베네수엘라의 국민적 아이콘이기도 하다.이러한 영광의 뒤에는 여러 가지 논란과 스캔들이 있었다. 우선 엘 시스테마는 차베스 정부의 홍보를 위한 문화적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알려진 것처럼 차베스는 집권 후 당시 호황이었던 석유 수출을 바탕으로 엘 시스테마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 프로그램의 성공을 정부의 성과를 증명하는 것으로 삼았다. 더 큰 문제는 차베스가 3선 연임을 위한 개헌을 시도하면서 국제 사회의 비판에 직면하였고, 그의 후계자인 마두로가 대통령의 직위에 오르자 증폭되었다. 엘 시스테마는 정권의 문제를 감추거나 들러리의 역할을 한다는 비난받았고, 차베스 정부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던 두다멜에게는 마두로 대통령에 관한 반대를 분명히 하라는 국내외적인 압박이 계속되었다. 2019년, 마침내 엘 시스테마의 단원들과 함께 두다멜은 베네수엘라의 정치 상황을 우려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편으로는, 이 음악교육 프로그램의 운영 방식과 관행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엘 시스테마 설립 초기부터 아브레우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조직이 운영되었다는 폭로가 나왔다. 교육 방식도 권위적이고 강압적이었다는 증언도 뒤를 이었다.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생긴 여러 가지 비위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안적 교육 시스템이자 문화예술을 통한 사회 개혁 프로그램이라는 명성에 금이 갔다. 무엇보다도 2015년 이후 베네수엘라의 경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고유가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석유 수출 수입액은 급감하였고, 정치적 불안은 인플레이션, 외화 유출 등으로 이어지면서 많은 국민이 생필품 부족과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정치적 불안으로 촉발된 경제적 위기로 인해 지금까지 약 8백만 명 이상이 조국을 등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국고의 지원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던 엘 시스테마 역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많은 교사가 이 프로그램을 떠나야 했으며, 시몬 볼리바르 관현악단 연주자의 약 40퍼센트가 악단을 그만두고 베네수엘라를 떠났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18년에는 설립자인 아브레우가 세상을 떠나면서 선장을 잃은 엘 시스테마는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렇다면 엘 시스테마는 끝난 것인가? 현재 엘 시스테마의 음악감독을 병행하고 있는 두다멜은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베네수엘라의 상황이 위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엘 시스테마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가치는 베네수엘라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확장되고 있다고 덧붙인다. 실제로 그가 15년이 넘게 음악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는 가장 혁신적이고 앞서나가는 연주단으로 유명하다. 두다멜이 온 후 이들은 주변 대학과 연계하여 매년 여름 음악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 축제에는 미국 각지의 청소년들과 소외된 인종·계층의 학생들이 초대되고, 이들에게 연주와 협연의 기회를 비롯하여 다양한 활동을 제공하고 있다. 엘리트 음악을 하는 예술인이지만 음악은 모두의 것이고, 특히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지 못하던 이들과 함께 클래식을 나누려는 목표를 실현하고 있다.
두다멜이 언급한 엘 시스테마의 정신은 이 프로그램 자체의 명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엘 시스테마가 강조하는 음악의 사회적 역할과 소외계층을 위한 예술교육 프로그램의 중요성이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는 가치와 정신이 된다면 더 이상 엘 시스테마가 강조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베네수엘라에서 시작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를 모델로 한 프로그램은 세계 각지에 퍼져있다. 스웨덴과 스코틀랜드 등 유럽 각지와 아시아, 아프리카까지 엘 시스테마라는 이름을 단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 중이다. 그리고 굳이 그 이름을 달지 않더라도 음악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시스템’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의 시스템화가 지구 곳곳에서 계속되는 한 엘 시스테마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박정원 경희대 스페인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