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수백명 회사 습격"…정부청사까지 뚫려도 '속수무책' [김대영의 노무스쿨]
입력
수정
산업현장 곳곳 사업장 점거 반복한 국내 조선소에서 노조원 260여명이 집결했다. 이들은 확성기와 부부젤라 등을 동원해 소음을 일으키면서 조선소 내 시설로 진입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진입을 막으려는 직원들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일부 인원이 다치기도 했다.
노조원 수백명 회사 점거하기도
사장실 점거에 생산라인도 세워
정부청사도 뚫렸지만 속수무책
경영계 "점거 전면 금지" 주장
노조원들은 발길을 돌려 조선소 내 크레인을 점거했다. 이 일로 해당 조선소는 선박 자재 운반에 차질을 겪어야 했다. 심지어 노조 위원장은 시설 진입을 막던 직원들을 향해 "회사의 개"라고 비난하다 모욕죄로 재판에 넘겨져 유죄 판결을 받았다.
관행으로 자리 잡은 '사업장 점거'…정부청사도 뚫려
기업들은 노조가 사업장을 점거할 때마다 정상적 경영에 차질을 빚는 등 피해를 감수해 왔다. 대규모 인원으로 복면을 쓴 채 사업장을 밀고 들어와 물리력을 행사하면서 '습격'이나 다름없는 점거 행위가 끊이지 않았다.현대제철 노조는 "현대자동차와 같이 특별공로금을 지급하라"면서 사장실과 공장장실을 점거했다. 전국택배노동조합은 '원청'인 CJ대한통운 본사를 19일간 점거했다. 현대차 울산공장에선 한 노조원이 업무강도가 세졌다는 이유로 몸에 쇠사슬을 감고 60분간 생산라인 가동을 방해했다. 한국지엠에선 성과급 지급 연기에 항의하던 노조가 사장실을 점거해 집기를 파손하기도 했다.
정부청사가 뚫리기도 했다. 한 노조 소속 조합원들이 고용노동부 처분에 불만을 품고 정부세종청사를 찾아 원하는 답변을 들을 때까지 퇴거하지 않고 열흘 넘게 눌러 앉으면서다. 고용노동부 공무원들이 거듭 퇴거를 요구했지만 노조원들은 공무원을 폭행하고 점거를 이어갔다. 노동조합법은 사용자의 점유를 배제하고 조업을 방해하는 형태로 쟁의행위를 할 수 없도록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 주도의 사업장 점거는 계속됐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파업 손해배상 청구 원인 중 약 50%는 사업장 점거로 인한 손해 탓이다.
점거 금지 범위 '모호'…법원·정부 해석도 제각각
사업장 점거가 노사 간 관행처럼 자리를 잡게 된 시작은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동쟁의조정법이 개정되면서 '쟁의행위는 사업장 이외의 장소에서 할 수 없다'는 규정이 마련됐다. 이 규정은 '사업장 안'이면 어디든 쟁의행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1987년 전국적 파업이 벌어졌을 당시 상황을 보면 작업거부 형태의 노사분규 3985건 가운데 직장점거는 3015건(75.7%)에 달했다.법원은 판결을 통해 정당한 쟁의행위의 범위를 설정하는 해석을 제시했다. 직장점거는 '사용자 측의 점유를 배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업도 방해하지 않는 부분적·병존적 점거'일 때만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현행 노동조합법엔 이 해석을 반영한 법 조항이 포함돼 있다. 이 조항은 2021년에 이르러서야 추가됐다. '생산 기타 주요 업무에 관련되는 시설'에서도 점거 행위를 할 수 없도록 못 박아 놨다. 그런데도 일부 노조들은 계속해서 점거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주요 업무 시설 범위가 명확하지 않은 데다 사건마다 법원 판결도 제각각이어서다.
고용노동부는 '조업 중단과 방해를 가져올 수 있는 시설'의 기준을 제시하면서 영업매장, 호텔·병원 로비 등을 주요 업무 시설로 정의했다. 그러나 법원은 영업매장이나 병원 로비를 점거한 사건에서 점거가 위법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놨다. 같은 장소를 점거했더라도 판사에 따라 판결이 엇갈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당은 불법 점거를 한 노조와 노조원을 상대로 사실상 손해배상조차 할 수 없도록 가로막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현행법상으론 불법행위 가담자 전원에게 연대책임을 부과할 수 있지만 야당안대로면 손해를 물어야 할 당사자별로 책임 범위를 나눠야 한다. 또 사용자 불법행위에 대해 노조나 근로자 이익을 지키고자 부득이하게 손해를 가했을 땐 배상 책임을 면제하도록 했다.
경총 "사업장 점거 전면 금지"…입법 제안도
경영계는 반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복면을 쓰거나 CCTV를 가리고 사업장 점거 등 불법쟁의행위를 하는 현실에서 조합원별로 가담 정도를 정확히 나눠 개별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서 "개정안이 현실화될 경우 산업현장은 사용자의 불법을 이유로 사업장 점거 등 극단적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현상까지 만연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했다.노조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가 문제라면 그 원인이 되는 폭력적 사업장 점거를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 경총의 주장이다.
경총은 국회에 경영계 건의 사항을 담은 '22대 국회에 드리는 입법제안'을 전달했다. 여기엔 '사업장 점거 전면금지'가 포함됐다.
미국은 판례법에 따라 사업장 점거를 불법행위로 판단한다. 영국에선 사용자 퇴거 요구에도 직장점거를 이어갈 경우 무단침입·업무방해가 성립된다. 독일도 사업장 점거 형태의 쟁의행위를 위법으로 간주한다. 프랑스 역시 사업장 점거를 금지하고 있다. 이동근 경총 상근부회장은 "우리나라 노사관계의 발전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불법행위에 면죄부를 줄 것이 아니라 사업장 점거 금지 등 합리적 노사문화를 구축하기 위한 법·제도 개선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kd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