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대신 루트비히를 외치자! 대관령 물들인 영웅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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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유창선의 오십부터 예술
8월 3일 평창대관령음악제 폐막공연 리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
그리고 제3번 교향곡 ‘영웅’
“영웅은 사상이나 힘의 승자가 아니라 순수하고도 강인한 인물이다. 그 정점에 베토벤이 있다.”
베토벤의 삶을 모델로 한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썼던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의 말이다. 개인의 고난을 딛고 인류의 환희를 노래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이 뜨거운 여름 평창 대관령에 나타났다.
올해로 21회를 맞아 성년이 넘은 평창대관령음악제. 지난 7월 24일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을 개막공연으로 시작된 이번 음악제는 8월 3일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와 제3번 교향곡 ‘영웅’을 폐막공연으로 11일간의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폐막공연을 맡은 이승원 지휘자와 평창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오케스트라였음에도 매우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며 대미를 장식했다. 11일간의 공연을 다 관람할 수는 없어서 토마스 체헤트마이어가 이끄는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국립 오케스트라의 메인 공연이 있은 27일, 그리고 송유진이 이끄는 춘천시립교향악단과 박재홍 피아니스트의 협연이 있은 28일을 택해서 이틀간의 모든 공연을 모두 관람했다. 개막공연인 24일의 제9번 교향곡 ‘합창’, 30일의 '피델리오'의 콘서트 오페라도 무척 가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마지막 폐막공연을 찾아갔다.첫 번째 방문 이틀 동안 모차르트, 하이든, 프랑크,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등의 곡은 이어졌지만 정작 베토벤의 곡은 들을 수가 없어서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이번 대관령음악제의 주제가 ‘루트비히(Ludwig)!’였는데 어째서 베토벤의 곡을 들을 수 없는 날들이 있을까 의아하기도 했다. 기왕에 ‘루트비히’를 주제로 내걸었다면 베토벤의 그 좋은 곡들로만 가득 채워도 차고 넘칠 텐데, 왜 굳이 다른 음악가들의 작품들이 그 이상으로 많았던 것일까. 베토벤의 이름인 ‘루트비히’를 주제로 잡았던 것은 단지 베토벤의 곡들만 연주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베토벤에게 “루트비히!”라고 친근하게 부를 수 있을만한 음악가들을 쭉 만날 수 있는 음악제를 의도했던 것이다.
양성원 예술감독의 얘기를 들으면 그 취지가 이해된다. “베토벤은 평생 음악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 전통의 계승을 동시에 추구했다. 올해 음악제는 베토벤의 가치를 함께 나눈 작곡가들의 곡을 다수 포함했다”라며 “바흐로부터 시작되는 전통에 대한 경의와 함께 혁신이 담겨있는 다양한 초연곡을 통해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연결성을 이곳 평창에서 나누고자 한다”는 것이 개막에 앞서 양 감독이 밝힌 의도였다. 베토벤 개인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루트비히’라고 부를 수 있었던 동료들, 그리고 그와 영향을 주고 받았던 음악가들을 연결시키는 무대를 만듦으로써 베토벤 음악이 가졌던 시대적 위치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대관령음악제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무더운 여름에도 초가을 같은 선선한 날씨의 대관령 자연 속에 와서 음악을 즐기는 맛이 될 것이다. 공연장 인근의 숙소들이 너무 고가이고 중저가의 숙소들을 찾기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가까이 투숙을 하면서 여러 날 좋은 음악을 즐길 수 있으면 그만한 피서도 없을 것이다.올해 대관령음악제는 알펜시아 콘서트홀과 야외공연인 뮤직텐트뿐만 아니라 ‘찾아가는 음악회’의 방식으로 강원 특별자치도 일원으로 반경을 넓혀 진행됐다. 그래서 모두 20회의 메인 콘서트, 7회의 찾아가는 음악회, 9회의 가족음악회 등 이전보다 다양한 공연들이 진행됐다. 그런가 하면 실내악 멘토십 프로그램, 마스터 클래스 등으로 구성된 대관령 아카데미 운영, 특별 강의 등의 교육적 기능을 강화한 부대 행사들도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은 기업이 아닌 공공기관이 주최하는 음악제로서의 공공적 역할을 염두에 둔 노력으로 풀이된다. 이제 21살이 된 대관령음악제는 그렇게 진화하고 있었다.
“외면적 성장보다는 내면적 성장을 추구하고, 20~30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 음악제만의 단단한 정체성을 만들고자 한다”라고 양성원 예술감독을 말했지만, 사실 대관령음악제만의 정체성을 찾고 만들어가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같은 평창에서 해마다 열리는 계촌마을의 클래식 축제는 정몽구 재단의 지원에 힘입어 올해만 해도 백건우, 이진상, 조성진, 김선욱 같은 슈퍼스타급 연주자들이 수많은 팬들의 관심을 모으는 음악제가 됐다. 하지만 공공의 음악제는 그들대로의 역할이 있는 법, 거장 연주자들뿐 아니라 새로 떠오르는 신진 연주자들과의 조화를 통해 좋은 음악들을 들려주는 것이 그 길이 될 것 같다.그런데 올해 줄어든 예산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대관령음악제의 도약을 가로막는 공연장의 근본적 문제가 있다. 강원도와 강원도 개발공사는 1조 6400억 원을 들인 알펜시아 리조트가 만성 적자에 시달리자 2016년부터 자산 매각에 들어갔는데, 4차례의 유찰을 거친 이후에 6800억 7000만 원이라는 헐값으로 KH강원개발에 낙찰됐다. 그런데 이 같은 헐값 매각 과정에서 KH그룹 소속 계열사들의 담합행위가 있었음이 얼마 전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밝혀져 과징금을 부과 받고 검찰 수사도 받게 됐다.하지만 헐값 매각 과정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묻든, 강원도가 알펜시아 콘서트홀을 되찾아 안정적인 공연 환경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제는 강원도의 소유가 아닌 알펜시아 콘서트홀은 규모가 작은 편이라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불가능하다. 그런 공연들은 야외공연장인 ‘뮤직텐트’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뮤직텐트는 외부의 소음에 취약하고 특히 여름에 에어컨 소리가 정적을 방해하기에 역시 안정적인 공연장이 되는 데 한계가 있다.
성년을 넘은 대관령음악제가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전용 콘서트홀이 필요한데 많은 예산이 필요한지라 난제를 풀기 어려운 상황이다. 강원도 원주에 대형 공연장 ‘더 아트 강원 콤플렉스’를 국비 50%의 지원을 받아 만든다는 계획이 발표됐지만, 대관령은 대관령대로의 자기 공연장이 절실하다. 지금은 공연장 주변에 고가의 숙박시설들만 있을 뿐, 중저가의 숙소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아 음악제 기간 동안 이곳에 계속 머물면서 공연 관람을 하기에도 부담이 따른다. 이런 문제와 환경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강원도와 강원문화재단은 올해의 대관령음악제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공연장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메인 공연들은 대부분 매진되며 클래식 팬들의 인기를 끌었다.이번 대관령음악제에서 ‘루트비히’라는 주제를 통해 알리고 싶었던 것은 베토벤이라는 인물과 곡을 넘어 아마도 ‘베토벤 정신’이었을 것이다. 베토벤은 250여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는 ‘불멸의 작곡가’로 우리 앞에 살아있다. 베토벤 음악의 고귀한 품격은 자신의 작품에 인간의 존엄성과 영혼과 예술적 가치를 극적으로 담아낸 작곡가라는 점에서 찾아진다.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는,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고통을 견디면서도 곡들을 만들어낸 불굴의 음악가였다.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서 베토벤은 동생들에게 자신이 겪는 고통을 이렇게 토로했다.
“함께 있는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플루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내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들리는 목동의 노랫소리를 나는 전혀 들을 수 없다. 그럴 때는 절망에 빠져 죽어 버리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오직 예술만이 나를 지탱해 줄 뿐이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모두 표현해 낼 때까지는 세상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 비참한, 정말로 비참한 삶을 참아내고 있다.”
“나에게는 친구도 없다. 나에게는 천하에 고독뿐이다”라고 일기에 썼던 1816년, 베토벤의 귀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1822년에 있었던 ’피델리오’ 공연에 관한 동료 안톤 쉰들러의 슬픈 증언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베토벤은 총연습 때 지휘하기를 청했다….. 제1막의 이중창에서부터 벌써 무대 위의 상황을 그가 도무지 듣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는 템포를 상당히 느리게 했다. 오케스트라는 그의 지휘봉을 따르고 있었으나 가수들은 제멋대로 서둘러 나갔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혼란이 일어났다.” 같은 혼란의 반복으로 연주는 두 차례나 휴식 시간을 가졌지만 베토벤의 지휘로 연주를 계속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알고자 베토벤은 쉰들러를 불러 수첩에 상황을 적어달라고 했다. 쉰들러는 수첩에 이렇게 썼다. “연주를 계속하지 말게. 이유는 집에 돌아가서 설명하겠네.” 베토벤은 후다닥 내려와서 밖으로 나가 집으로 돌아갔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쉰들러는 그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베토벤과의 모든 교제 기간을 통하여 그날의 숙명적인 하루에 비할 만한 날을 나는 기억 속에서 찾아볼 수 없다.”하지만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베겔러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운명의 목덜미를 움켜쥘 작정이네. 운명이라는 놈이 나를 굴복하게 하거나 완전히 으스러뜨리진 못할 거야.” 그는 고통스럽고 고독했지만 그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곡들을 만들어 나갔다. 베토벤이 자신을 외톨이로 생각했다면 네 사람의 음악적 대화로 이루어진 현악사중주 같은 걸작들은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베토벤은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고 자신의 영혼을 지키며 사랑과 우정, 대화와 협력, 환희와 희망을 담은 곡들을 만들어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24년 5월 7일 베토벤이 제9번 교향곡 ‘합창’을 지휘했다. ‘합창’은 오케스트라에 솔리스트와 합창을 집어넣은 최초의 교향곡이라는 점에서 음악의 미래를 열어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그날 연주가 끝나자 청중들은 떠나갈듯한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그 소리가 베토벤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한 출연자가 그를 객석 방향으로 돌려세워 주었고, 청중들이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을 위해 기립해서 모자를 휘두르며 박수를 보내고 있는 광경을 보고서야 비로소 뜨거운 반응을 알 수 있었다. ‘합창’ 교향곡 4장에서 인류의 화합을 염원하던 ‘환희의 송가’는 그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만들어진 곡이었다. 자신이 겪는 개인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화합의 세상을 그처럼 아름답게 노래한 예술가의 정신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기쁨이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이여,베토벤이 세상을 떠나던 날 묘지 입구에서 작가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추도사가 엄숙히 대독됐다. 그릴파르처에게 베토벤은 "원래부터 전 시대를 통틀어 위대했으며", 그런 그의 지위는 "영원히 침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헨델과 바흐,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불멸의 명성을 물려받아 이를 한층 더 확장한 자”였다. 그릴파르처는 베토벤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그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예언했다. 그가 떠난 곳이 바로 "예술이 끝난 지점"이기 때문이다. (얀 카이에르스 <베토벤>)
낙원의 딸이여,
우리 모두 불에 취해 하늘 성소로 들어가네.
세상 관습이 엄격히 나눈 것을 다시 묶는 신의 마법,
신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리라.”
(‘환희의 송가’)
베토벤의 스승이었던 하이든의 예상은 정확했다. "베토벤은 장차 유럽의 가장 위대한 음악 예술가 중 하나가 될 것이며, 저로서는 그의 스승 노릇을 했다는 사실이 대단히 뿌듯할 것입니다." 에드먼드 모리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베토벤 음악의 보편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보편성이란 다시 말해, 소리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모든 의심과 갈등을 하나로 화합하여 이윽고 죽음에 대한 고통으로부터 삶에 대한 사랑까지 인간 감정 전체를 아우르는 능력이다.”(에드먼드 모리스 <인간으로서의 베토벤>)인간의 내면에는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존재한다. 낙담과 절망, 분노와 시기, 흥분과 격정, 그래도 사랑과 꿈과 희망 같은 여러 색깔의 감정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다. 베토벤의 음악이 위대한 것은 자신의 삶은 끔찍하게 고독하고 고통스러웠지만,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을 껴안으며 누구보다 깊고 성숙한 음악을 남겨준 점이다. 그래서 2024년 여름 대관령에 울려 퍼진 ‘루트비히!’와 그 친구들의 음악은 갈등으로 점철된 혼란스러운 시대의 청량제와도 같았다. ‘황제’와 ‘영웅’을 마지막으로 듣고 나와 밤길을 걸으면서 나도 ‘루트비히!”를 여느 친구의 이름처럼 불러보았다.
유창선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