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텔로' 공연 앞두고 25년간 묵혀뒀던 DVD를 꺼내봤다

[arte] 이현식의 클래식 환자의 병상일지
오페라
이것이 바로 ‘전설의 레전드’… 젊은 클라이버, 도밍고, 프레니의 '오텔로'
8월에 <오텔로> 실황 공연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보게 되었으니, 그 전에 집에 있는 영상물을 몇 가지 챙겨보기로 마음먹었다. <오텔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페라 가운데 하나여서 10종 가까운 영상물을 갖고 있다. 무척 어렵게 구해놓고도 25년 가까이 묵혀두었던 DVD에 드디어 손이 갔다.
클라이버와 도밍고의 1976 스칼라 공연실황 DVD 커버 스캔본. / 사진제공. 이현식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를 맡고 더 젊은 플라시도 도밍고와 미렐라 프레니, 피에로 카푸칠리가 주연을 맡았다. 이 대가들의 조합만으로도 가슴이 뛰는데, 이 실황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 의미가 있다.공연 일자는 1976년 12월 7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200주년 기념 시즌 공연이었다.
1976년 12월7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200주년 기념시즌 공연 포스터 / 사진출처. 라 스칼라 공식 아카이브
영상물의 해설지에 따르면, 스칼라에서 오텔로는 1959-60시즌 이후 상연된 적이 없었다가 1976-77시즌 개막작으로 선택되었다고 한다. 당초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할 예정이었으나 그가 음악감독직을 사임하면서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대타로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당시에 ‘떠오르는 별’이었던 세 주연 가수는, 스칼라에서 <오텔로>의 배역을 부르는 것이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막이 오르기 전, 카메라는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비춘다. 1930년생이니 이때 46세인데, 영상에선 나이보다 더 젊어 보인다. 주름살 하나 없는 젊은 얼굴의 그가 낯설어 보일 지경이다. 클라이버가 예비 박을 하나 둘 셋 넷 세더니 팡- 하고 지휘봉을 튕겨낸다. 지휘봉 끝에서 번갯불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 극 중 사이프러스 항구에 몰아치는 폭풍우는 그가 일으키는 것이었나보다.
&lt;오텔로&gt; 1막 지휘를 시작하는 카를로스 클라이버. / 자료 제공. 이현식
폭풍을 뚫고 배에서 내린 오텔로가 ‘엑술타~테’를 외친다. 1941년생, 당시 아직 35세인 젊은 도밍고다. 이후의 여러 영상물에서 봐온 도밍고에 비하면 깡마른 모습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체형인데, 그 기세는 실제로 전투를 뛰고 돌아온 현역 장교 같다. 불을 뿜듯 노래하는 30대의 도밍고는 마치 래리 버드의 보스톤 셀틱스를 상대로 63점을 꽂아 넣던 신인 시절의 마이클 조던을 연상시킨다. (이 경기 후 래리 버드는 ‘신이 마이클 조던의 모습을 하고 내려왔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아고를 노래하는 피에로 카푸칠리의 기세 역시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당시 서구 매체들의 리뷰를 찾아보면 ‘미묘함을 표현하는 피아니시모는 제쳐두고 냅다 지른다’는 평들이 좀 있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인데, 이 공연에서 느껴지는 치열함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감안하면 카푸칠리가 그날 왜 그렇게 노래했는지 충분히 납득이 된다. 도밍고와 카푸칠리가 토해내는 복수의 2중창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오텔로를 부르는 도밍고와 이아고를 부르는 카푸칠리(왼쪽). / 자료 제공. 이현식
미렐라 프레니(1935-2020)에게 데즈데모나 역을 불러보라고 한 건 카라얀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970년에 자신이 지휘해 프레니를 데즈데모나로 데뷔시킨 뒤 “이 역할이 이렇게 노래가 되는 걸 듣기 위해 40년을 기다렸다!”고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바로 그 시절 프레니의 데즈데모나가 이 영상에 기록돼 있다. 당시 41세인 그녀는 일반적으로 기억되는 모습보다 훨씬 젊고 심지어 가냘파 보이는데, 노래는 이미 중년 이후의 가창만큼이나 깊다.
오텔로와 데즈데모나의 1막 끝 장면. / 자료 제공. 이현식
네 명의 젊은 대가가 뿜어내는 열기에 스칼라 극장의 객석도 후끈 달아올랐다. 객석에선 환호와 박수, 그리고 몇몇 관객의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과 조용히 하라는 맞고함이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그 당시 스칼라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관객의 열정이 함께 완성한 장르임을 현장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카메라 앵글과 화면비율 및 화질로 볼 때, 이탈리아 TV 방송 소스로 보인다. 음질은 조금 아쉽다. 1976년이라는 시기를 생각하면 좀 더 나은 스펙의 녹음도 가능했을 텐데, 스테레오도 아니고 모노다. 마이크의 위치가 좀 이상했거나 오디오 픽업이 잘못됐는지, 중간에 스태프들의 대화로 추정되는 말소리가 들리기도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의 현장감과 흥분은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포착되었다. SP 시대의 무편집 모노 녹음에서 들리는 묘한 실황감 같은 것도 느껴진다. 커튼콜 장면을 보면서 마치 내가 현장에 있는 듯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타임머신을 타고 1976년 12월의 밀라노에 가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전설의 레전드’라는 말은 당초 과장을 위해 다소 코믹하게 만들어진 조어이지만, 이 공연의 대단함을 달리 표현할 언어가 마땅치 않다.
오텔로 1막에서 포효하는 1976년의 도밍고 / 사진제공. 이현식
클라이버, 프레니, 카푸칠리 모두 세상을 떠났고, 바이든 미국 대통령보다 한 살 많은 도밍고는 (1941년생) 사실상 은퇴 상태다. 내가 어릴 적 현역이던 음악인들이 하나씩 기록 속의 전설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기분이 묘하다.

영상 속 공연으로부터 48년이 지난 지금 오페라가 더 이상 그 시절의 영광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당시엔 오페라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던 한국 땅에서 점점 더 좋은 공연들이 열리고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이달 18일부터 무대에 오를 로열 오페라 <오텔로>가 한국 오페라 공연사에 새로운 레전드로 기록되길 기대한다. 그 레전드를 따라 국내 제작 오페라의 새로운 전설이 탄생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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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식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