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전도연도 못 가진 '이상한 틈새'로 뭐든 다 해내는 염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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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오동진의 여배우 열전 - 염정아만약 내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고 배우 염복순(1952년생으로 현존해 있다.)에 대한 전기 영화를 찍는다고 한다면 캐스팅 1순위는 염정아이다. 염복순은 1975년 김호선 감독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였다. 하층계급의 고단하고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여인 영자가 ‘오라이 오라이’하는 버스 차장으로 일하다 바퀴에 깔려 팔을 잃는다. (그때의 콩나물 시루떡처럼 타야 했던 버스를 기억하는가) 외팔이가 된 영자는 여관방에서 일하며 남자의 등을 밀어주고 몸을 파는 창녀가 된다. 1970년대 박정의 시대 말기의 암울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일상이 지옥이었던 세상을 영자라는 여인을 통해 그린 세기의 걸작(김호선 감독 스스로는 그걸 의도하지도, 깨닫지도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이다. 한국 영화 최고의 문제작 중 하나이며 염복순이라는 배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염복순 역을 염정아가 하면 딱 제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다만 중요한 것은 염복순에게는 있지만 염정아에게는 없는 것이 있다. 가난한 퇴폐미이다. 퇴폐적인 느낌의 여인도 종류가 있다. 돈이 많고. 그래서 삶이 그저 흐느적거릴 수밖에 없는 여자가 있다.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뷰캐넌 같은 여자이다. 돈과 옷, 파티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여자. 우아한 척 알고 보면 ‘상스러운’ 여자들이다. 반면에 온몸에 천박함이 흘러넘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는 여자가 있다. 저지대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신분과 계급 탓에 못 배우고 못 가꿨지만 그래서 오직 자기 삶의 무기라고 하는 것이 성적인 것, 혹은 그런 느낌밖에 없는 여자도 있다. 이런 천박함에는 진실과 진심이 있다. 창녀의 진심이고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가 그랬다. 염복순은 그걸 표현하였는데 염정아가 그걸 해 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영화를 연출할 사람과 염정아 간에 염복순이란 인물을 놓고 엄청난 대화를 하고 그래서 메소드 연기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염정아가 염복순 역할을 해낸다면 불멸의 여배우로 남을 것이다. 뇌피셜이다.염정아는 올해 52살이고 여전히 경쟁력이 만만치 않은 배우이다. 50대 초반 여배우 중 몇 안 되는 스타급 연기자이다. 염정아에게는 이상한 틈새가 있는데 김혜수는 부담스럽고, 전도연에게는 맞지 않으며, 이영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역할에 어디든지 쓰일 수 있는, 다용도의 여배우라는 점이다. 주연도 좋고 조연급 주연으로도 맞고 아예 조연으로도 맞는 여배우가 염정아이다. 이런 50대 여배우, 한국에는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지난 20여 년 동안 늙지를 않는다. 비교적 평생 같은 얼굴로 살아가는 극소수의 여배우이다. 다시 비교해서 뭣하지만, 김혜수는 여전히 너무 볼륨감이 넘치고 전도연은 점점 더 깡말라 가고 있을 때 염정아는 외모에 있어 늘 ‘평타’를 친다. 이런 장점은 누구도 따라가기 어렵다. 살아남는 자가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가는 자가 살아남는다. 진리이다.
염정아 때문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운 영화는, 무지하게 오래된, 권종관이란 감독이 만든 ‘새드 무비’(2005)란 영화이다. 놀랍게도 정우성과 임수정, 신민아, 차태현 등 초특급 배우들이 나왔던 옴니버스 영화였고 염정아는 한편에서 에피소드 한 편을 담당하는 배역으로 나온다. 싱글맘이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생계를 꾸리느라 고군분투하지만 정작 아이의 투정은 날로 심해지는 그런 젊은 엄마 역이다. 그런데 그 고단한 삶이 암으로 끝나 간다. 신파의 절정으로 치닫는 영화이고 염정아 분량이 더욱 그러한데 특히 죽어가는 엄마가 아이에게 편지를 남기고 그 편지 내용을 이별 대행업을 하며 백수 생활을 견디고 있는 차태현이 읽어 가는 대목에서 극장 안은 눈물바다가 된다. 염정아는 청순한 처녀가 아니라 청순한 엄마 역할, 그 이미지에 있어 최고봉이다.이런 엄마가 만약에 간신히 살았다면 그래서 아들을 성인으로 키워 냈다면 ‘새드 무비’의 모자는 영화 ‘시동’(1019)의 모자인 택일(박정민)과 택일 모(母)의 관계가 됐을 것이다. 염정아는 ‘시동’에서 토스트 가게를 하며 억척스럽게 살아가지만 정작 아들 '새끼'는 스쿠터나 타고 다니며 양아치 짓을 한다. 웬만하면 택일의 온갖 ‘짓거리’를 참아 주며 살아가지만, 아들은 종종 엄마의 역린을 건드린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들의 뺨을 후려치는 데 문제는 이 엄마, 예전 국대 배구 선수 출신이라는 것이다. 네트 너머로 강스파이크를 때리듯 엄마는 붕 날아가서 못나고 못되게 구는 아들 택일의 뺨을 후려갈긴다. 사람들의 마음도 후련해진다.흥행 면에서는 그다지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염정아의 출연작 중 ‘오래된 정원’(2007)도 비교적 주옥의 필모그래피로 꼽힐 만하다. 원래는 황석영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은, 그리고 소설만으로라도 (요즘 MZ 세대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1980년대를 살아간 세대들의 누선을 자극한다. 1980년 전두환 독재체제가 들어서고 학생운동의 주역이었던 현우(지진희)는 긴급체포를 피해 ‘도바리(수배를 피해 도망을 다닌다는 의미의 은어)’를 치는데 이때 그를 숨겨주는 여자가 한윤희, 곧 염정아이다. 한윤희는 현우에게 말한다. “사회주의요? 난 그런 거 몰라요. 씻기나 해요. 냄새나요.” 이 둘이 자의 반 타의 반 밀월의 신혼여행처럼 지내는 곳은 경기도 안양이나 의왕 어디쯤인 갈뫼란 곳이다. 근교이지만 한적하고 전원 풍경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 윤희는 현우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무릇 모든 남자가 결국엔 한심한 지경을 보이듯, 현우 역시 자신이 무슨 대단한 영웅이라고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지로 투옥된다. 그리고 17년이 흐른다. 현우는 석방되지만 이미 윤희는 세상을 떠난 터이다. 소설과 영화는 그런 윤희와의 짧았던 사랑 이야기를 플래시백으로 보여 준다. 내 기억에 소설은 현우는 윤희가 낳은 딸(자신과의 딸인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지 불분명하지만)과의 새로운 생을 이어가는 내용으로 돼 있다. 영화는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염정아는 학생운동을 하는 여자로는 어울리지 않지만, 학생운동을 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로는 어울린다. 허울 좋은 거대 담론의 덫과 그 관념의 망상에서 헤매는 남자를 씻겨주고 안아서 재워 줄 수 있는 여자. 그게 바로 염정아의 이미지이다.염정아는 지금까지 30편이 넘는 영화에 나왔다. 꽤 많은 편수이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2003)에서 염정아는 아빠 무현(김갑수)의 내연녀인 은주 역으로 나온다.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큰딸 수미(임수정)가 주방에 있을 때 아이는 싱크대 밑에서 귀신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은주의 환영을 본다. 한국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으로 지난 20년간 이 영화의 공포를 이긴 작품은 없다. 염정아의 바로 ‘그 모습’ 때문이다. 이상 연쇄 살인자 얘기를 그린 ‘H’(2002)에서 여형사 역할도 염정아에게는 어울린다. 일종의 랫 팩 무비였던 ‘범죄의 재구성’(2003)에서 싸구려 사기꾼 역의 염정아도 어울렸다. 염정아는 사이코 연기와 팜므 파탈, 형사와 사기꾼 역할을 종횡무진한다. 이만한 배우도 없다.염정아의 새 영화 ‘크로스’가 또 한 번 흥행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코미디이다. 약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설경구 – 문소리 버전의 ‘스파이’(2013)와 크게 차이가 나는 설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영화 ‘스파이’에, 브래드 피트 – 안젤리나 졸리의 ‘미스터 존스 미세스 존스’ 혹은 아놀드 슈왈제네거 – 제이미 리 커티스 주연의 ‘트루 라이즈’를 합친 느낌이다. 이번 황정민 – 염정아 조(組)가 모든 영화를 뛰어넘을지 두고 볼 일이다. 염정아는 여기서 광역 수사대 팀장이다. 남편 황정민은 전업주부였는데 알고 보니 날고 기는 전직 특수 요원이라는 설정이다. 아이 진부해라. 영화의 식상함을 배우들의 뛰어난 코믹 연기가 커버한다. 다행이다. 염정아로서는 평작이지만 의외로 히트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염정아가 늘 우리 곁에 있음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거면 됐다.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