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형 돈키호테, 멕시코가 낳은 거장 가브리엘 오로즈코
입력
수정
동시대 이끄는 개념미술가이자 설치미술가로 명성가브리엘 오로즈코(62)는 이 시대 가장 논쟁적인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살아온 궤적이 그랬다. 멕시코 베라크루즈주 할라파에서 예술가 부모님 사이에 태어난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일찌감치 동시대를 이끄는 개념미술가이자 설치미술가로 명성을 얻었다. "스튜디오에 얽매이면 작품에도 한계가 생긴다"며 뉴욕, 멕시코, 파리 등 어디에서나 작업해온 '포스트 스튜디오 작가' 1세대다. 매체와 양식에 국한되지 않고 즉흥적인 방식으로 만들어낸 작품들은 언제나 논쟁적이고, 유머러스한 동시에 고급스럽게 체제를 비판했다.
서울 청담동 화이트큐브서 9월4일~12월14일 전시
그는 조각가, 사진가, 설치예술가, 화가 등 하나로 규정할 수가 없다. 이는 작가 스스로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새로운 변화를 평생 즐겨운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단 하나의 '무엇'을 찾으라면 그것은 자연. 자연을 구성하는 기하학적 형상을 수십 년간 관찰하고 토착 소재들로 작품을 해온 그의 식물회화 연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9월 4일부터 12월 14일까지 서울 청담동 화이트큐브 서울관 개관 1주년 기념전 '가브리엘 오로즈코'에서다. 20대부터 세계를 누빈 '멕시칸 스타'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1996년 뉴욕휘트니비엔날레, 1997년 카셀도큐멘타, 2000년대 베네치아비엔날레 등 국제 무대에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를 가장 유명하게 한 전시는 1993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의 개인전이다. 미술관 정원에 누구나 누울 수 있는 그물의자를 설치한 뒤 그 주변 건물의 건물주들에게 전시 기간 동안 창가에 오렌지를 놓아두도록 부탁했다. 그물에 누워 시선을 돌리면 어디서나 오렌지가 눈에 들어오는 'Home Run'(1993) 작품이었다. 미술관의 건축적 권위, 제한된 공간을 넘어선 사례였다. 자동차를 세로로 잘라 엔진과 핵심 공간을 없애고 연결해 마치 배처럼 만든 '시트로엥 DS'(1993), 플라스틱 점토를 하수구 옆에 던져놓은 'Yielding Stone'(1992), 자전거 네 대를 이어붙인 'Four Bicycles(There is always one direction)'(1994)처럼 일상의 사물들을 다시 보게 한 '아르떼 포베라' 형식이 그의 1990년대를 지배했다면 2000년대 들어선 더 과감해졌다. 스페인 남서부 해안에서 좌초된 고래에서 영감을 받아 길이 약 15m의 고래 골격을 탄산칼슘과 수지로 복원한 '다크 웨이브'(2006)는 흑연 패턴으로 뒤덮여 바닥에 비친 그림자가 마치 물 표면의 물결처럼 보이도록 제작했다. 오로즈코의 노마드적인 삶은 수집벽으로도 이어진다. 그는 일상에서 발견된 물건 대부분을 전시장에 그대로 전시하곤 한다. 퐁피두 센터 전시에선 멕시코 사막에서 모은 식물들을 마치 고고학 연구물처럼 늘어 놓았는데, 작은 조각을 확인하러 가는 관람객들에게 2명의 멕시코 경찰관들은 요란하게 호각을 불며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친다. 퍼포먼스 작품과 같았던 이 작업엔 사연이 있다. 전시를 준비하며 '누구나 가까이 다가와서 자세히 보게 해달라'는 작가의 요구에 미술관 측은 "검은 선을 쳐서 작품을 보호해야 한다"고 원칙을 고수한 것. 오로즈코는 아예 미술관의 철통 보안을 비꼬며 오히려 경찰관 복장을 한 이들을 섭외해 작품을 돌보고 과도한 제재를 취하게 했다. 편의점이나 '아무 곳이나' 나의 전시장
평생을 떠돌던 오로즈코를 아는 사람들이 궁금한 점 하나가 있다. 대체 그 많은 작품을 어디에 보관할까. 그는 1992년부터 영국 마리안굿맨갤러리 수장고에 작품을 보관해왔다. 팬데믹 기간 그는 뉴욕 57번가 어느 공간을 빌려 6개월간 자신만의 뷰잉룸을 만들고, '스페이스 타임'이란 이름의 전시를 열었다. 25년에 걸친 유물을 담아 '보이는 수장고'를 만든 셈인데, 아무 홍보 없이도 사람들이 찾아왔고 작품도 팔았다. 이 전시는 작가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입소문 나며 2년간 계속 됐다. 앞서 2017년엔 멕시코시티 쿠리만주토 갤러리(Kurimanzutto Gallery)에서 '오록소 편의점 (Oroxxo Convenience Store)'을 선보이기도 했다. 멕시코의 흔한 편의점 이름인 '옥소'를 본떠 갤러리에 편의점 하나를 통째로 들여왔다. 갤러리와 편의점을 섞어 허울뿐인 빈 공간에 소비 문화를 가시화한 작품들을 모았다. 식물이 완성하는 오로즈코의 세계
이번 전시는 그의 다채로운 작업세계를 관통하는 본질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롭다. 2016년 영국 사우스 런던 갤러리의 정원을 디자인하면서 자연에 더욱 심취한 그는 현재 남미 대륙에서 가장 큰 공원이자 여의도 두 배 면적을 가진 멕시코시티 차풀테팩 공원 재생프로젝트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이번 신작은 2021년과 2022년에 걸쳐 작업한 700여 점의 연작 시리즈 'Diarios des Plantas(식물도감)'의 연장선이다. 종이 위에 나뭇잎 프린트를 하고 과슈와 흑연으로 그려냈다. 색채와 형태가 자유로운 이 작품들은 멕시코 아카풀코와 일본 도쿄 등에서 발견한 현지 동식물의 기록이자, 백과사전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980년대 회화의 버블 시대에 "난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작가의 회귀이자 국경과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렸던 한 시대의 악동이 다시 캔버스 앞으로 돌아온 장면이기도 하다. 아시아 전통 회화에서 나타나는 스며들고 희미해지는 원형의 모티프를 찾는 것도 재미있겠다. 오로즈코는 추상화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추상화는 20세기 예술의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다. 현실에 대한 언급 없이 이 여백 앞에 서서 창작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위에서 스스로 정한 규칙에 의해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고 변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