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두 석학의 알쓸신잡
입력
수정
[arte] 신지혜의 영화와 영감1939년 9월 어느 날. 런던 노신사의 집에 손님이 온다.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긴장된 상황 속에서 옥스퍼드에서 기차를 타고 온 방문객은 C. S 루이스. 그리고 그를 초대한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루이스는 프로이트가 자신을 부른 것은 아마도 유신론적 배경을 지닌 자신의 저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에 대해 논쟁을 벌이게 되지는 않을까 짐작하면서도 만나기 어려운 그분을 뵈러 런던에 온 것이다.하지만 프로이트의 집에 놓여 있는 성인들과 신들의 조각상과 호기심이 생기고 이런저런 질문을 해 오는 프로이트의 모습에 루이스 또한 더 큰 흥미를 느끼게 되고 (게다가 젊은 시절 프로이트의 책에 빠져있던 그가 아닌가)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한다.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루이스의 <순례자의 귀향>을 슬쩍 비교하면서 프로이트는 루이스를 찔러 본다. 존 번연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동굴에 잘 왔다고 쓰윽 미소를 짓는 프로이트에게 루이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에 이야기를 얹어 가며 지식의 향연을 벌인다.
루이스가 프로이트의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심오한 주제의 대화가 시작된다. 루이스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유년기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신앙을 버렸던 계기와 회심한 계기를 우아하게 이야기하고 프로이트는 비슷하지만 다른 자신의 유년기의 숲을 말한다.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영국식 농담에 대한 이야기, 루이스가 속해 있는 옥스퍼드의 ‘잉클링스’이야기는 신화에 대한 견해와 토론으로 이어지고 실존했던 예수에 대한 논쟁으로 확산한다.
이야기는 급기야 동성애로 옮겨가고 이 논제는 기억 속 상흔과 사람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로 퍼져 가고 프로이트가 보여 준 그리스의 신 ‘모무스’로 인해 신에 대한, 신의 존재에 대한, 신의 역할과 성품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한다.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프로이트가 세상을 뜨기 3주 전, 런던 그의 집을 방문했던 ‘옥스퍼드의 교수’와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는 ‘옥스퍼드 교수’가 유신론자 엄밀히 말해 성공회 신자인 C. S 루이스로 상정해 당대 내로라하는 두 석학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지만 실제로는 프로이트를 방문한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어쨌거나 이 영화는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두 사람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프로이트와 루이스 역을 맡은 두 배우도 엄청난데 안소니 홉킨스와 매튜 구드가 역을 맡아 탄탄하고 짜임새 있는 공기를 만들어 낸다.
세상에 ... 이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두 시간이 조금 안 되는 분량에 담아내다니. 영화 속 프로이트의 대사처럼 ‘이것이야말로 광기’가 아닐까 싶다.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를 둘이 풀려고 하다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버겁지 않게 무겁지 않게 그러나 가벼운 말장난으로 그치지 않게 무게중심을 잘 잡고 있다. 사실 유신-무신론을 비롯해서 정신병리학적 문제와 신화, 관계 등을 망라해서 이야기하기에 이 시간은 턱없이 모자라지 않은가.하지만 이 작품의 장점은 그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꾸역꾸역 집어넣지 않았다는 것과 끝도 나지 않을 이야기를 첨예하게 끌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도 끝도 없을 이야기를 지식 자랑하듯 펼쳐 놓은 작품이 아니라 프로이트와 루이스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스스로의 기억을 상처를 회복을 관계를 생각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리라.그를 위해 영화는 좋은 장치를 쓰고 있다. 책으로 이야기하면 도비라를 잘 활용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야기가 확장되고 이야기가 번져 갈 때 적당한 지점에서 매듭을 짓고 새로운 모티브를 던져 주어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점을 잡아주는데 방향을 틀어 주는 그 지점을 훌륭하게 잡아 준다.
예를 들어 공습 사이렌이 울려 두 사람이 대피소로 가게 되며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농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담당 의사가 바빠서 못 오겠다는 전화를 받은 프로이트는 자신의 구강암과 고통을 이야기하며 신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낸다.
아버지의 연락을 받은 안나는 강의마저 중단하고 약을 찾아 헤매고 안나의 이야기는 안나와 지그문트의 관계, 안나와 도로시의 관계로 연결되며 루이스와 무어 부인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닥터 어네스트의 짧은 방문은 프로이트의 다른 딸 소피와 손자의 어이없고 마음 아픈 죽음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신에 대한 논쟁으로 또다시 번진다.
자. 이래가지고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이야기를 언제 어떻게 끝낼지 슬슬 조바심이 날 때쯤 프로이트는 다시 라디오를 켠다. 그리고 바로 꺼버린다. 라디오를 켰다 껐다 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프로이트를 보며 루이스는 왜 그냥 켜두지 않느냐고 묻는다. 프로이트는 답한다. 라디오는 뉴스를 들으려고 켜는 것인데 음악이 나오면 마치 교회음악 같아서 꺼버린다고 말이다.하루가 그렇게 흘러가고 이제 루이스는 옥스퍼드로 돌아가야 한다. 두 사람은 엄청난 대화를 나누었지만, 상대의 마음을 돌리려거나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묻어났기에 두 사람의 표정은 어딘가 아쉬워하는 듯 보인다. 함께 있는 시간, 함께 나는 대화, 함께 했던 분위기로 서로가 서로를 조금 더 알게 되고 그래서 다행이라는 듯한 분위기랄까.
일례로 안나가 아니면 의사조차도 손대지 못하게 하는 보청기를 루이스에게 빼달라고 한다. 주위에 루이스밖에 없기도 했지만, 프로이트의 그 행동과 부탁은 루이스에 대한 일말의 신뢰와 인정의 몸짓이 아닐까.
또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절대 듣지 않고 바로 꺼버리던 프로이트가 이번에는 라디오를 그냥 켜 둔다. 라디오에서는 방금 조지 국왕의 서거를 알리는 뉴스가 나왔고 곧 음악이 시작되었음에도 말이다. 루이스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프로이트를 바라보고는 프로이트의 집을 나선다.
그리고 기차 안에서 펼쳐 보는 루이스의 책 <순례자의 귀향> 속지에 쓰인 프로이트의 친필은 이러하다.
‘오류에서 오류로. 우린 온전한 진실을 발견한다’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섹션>은 이렇게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과 존경을 보임으로써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고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느껴보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주고 있다.
이 영화는 어쩌면 두 석학의 지식의 향연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자신의 신념과 주장이 맞다고 대립각을 세우는 두 석학의 자존심 싸움이 아니다.
이 영화는 개인의 기억들에 대한 어루만짐이며 개인의 관계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고 각자의 신념과 생각에 대한 존중이며 각자의 행동과 마음에 대해 들여다봄이다.영화 속에서 인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숲의 이미지이다. 루이스의 유년기, 숲에서 찾은 ‘기쁨’, 프로이트의 유년 시절, 숲에서 느낀 ‘갈망’. 톨킨과 루이스가 함께 걷던 숲에서의 대화, 전쟁에 참여했던 루이스가 포격 중에 본 숲의 이미지 그리고 비로소 밝은 빛이 쏟아지는 루이스의 숲의 이미지.
우리는 모두 우리의 내면에 숲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그 숲을 들여다보고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권유한다. 프로이트의 편에 서라거나 루이스의 편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루이스가 프로이트에게 작별을 고하고 집을 떠날 때 라디오에서 흐르는 그 곡은 루이스가 기차를 타고 갈 때까지, 안나가 도로시와 손을 잡고 아버지 앞에 앉을 때까지 계속 흐른다. 그 곡은 And the waltz goes on. 바로 안소니 홉킨스 경이 작곡한 곡이다.거장에 대한 존경을 담은 인사와도 같아, 이 곡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신지혜 칼럼니스트·멜팅포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