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 학비 벌러 뱃사람 됐던 카일리 매닝, 그녀의 '파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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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리 매닝 한국 첫 개인전햇볕에 붉게 탄 얼굴, 강인한 눈빛과 굳게 다문 입매. 미국 출신 화가 카일리 매닝(41)의 첫인상은 강렬하다. 미대 학비를 벌기 위해 연어잡이 배의 선원과 500t급 선박의 항해사로 일하며 거친 파도와 바람을 견딘 경험 때문이다. 매닝은 망망대해 위에서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배에서 내린 후 화폭에 그대로 옮겼다. 그리고 세계적인 갤러리 페이스의 주목을 받으며 미술계에서 떠오르는 유망 작가가 됐다.
스페이스K에서 11월 10일까지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에서 열리고 있는 ‘황해’는 매닝의 작품 20여점을 만날 수 있는 전시다. 전시 제목인 황해는 한반도 서쪽에 있는 서해를 의미한다. 작가는 “한국 전시를 준비하다가 황해의 만조와 간조의 차가 최대 9m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여기서 구상과 추상의 밀고 당김을 떠올렸다”고 말했다.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구상화와 추상화는 정 반대의 개념으로 쓰일 때가 많다. 하지만 모든 작품은 사실 구상과 추상이 뒤섞여 있다. 구상의 요소가 많으면 구상화, 추상이 더 많으면 추상화로 분류되는 식이다. 작가는 “바다에서 파도와 밀물, 썰물 등을 바라보며 항상 ‘반대되는 개념이 섞이는 것’에 대해 생각해왔다”며 “그런 고민을 이미지로 표현하다 보니 구상과 추상이 뒤섞인 형식의 그림을 그리게 됐다”고 했다.
매닝의 작품을 보다 보면 파도가 휘몰아치는 듯한 붓질 속 희미한 인물들의 형상들에 눈길이 간다. 유행이나 감정과 같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파도’가 지나간 후에도 남아 있는, 사람과 관계 등 소중한 존재들을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직접 봤을 때는 가벼운 붓터치와 질감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장욱 스페이스K 큐레이터는 “물감을 엷게 여러 겹 칠하고 각 층의 유분으로 빛을 굴절시켜 바로크 회화처럼 빛을 내는 효과를 만들어냈다”며 “윤택한 질감과 섬세한 색채의 균형이 돋보이는 기법”이라고 말했다.전시장 한 가운데 천장에 매달린 7m 길이의 작품 세 점이 눈에 띈다. 매닝이 실크에 그린 그림들이다. 매닝은 “관람객들이 실크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그림 속 ‘붓질’이 되고, 작품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 전시를 기념해 제작한 '머들'(돌무더기)도 주목할 만하다. 제주도 신화와 해녀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설명이다. 전시는 11월 10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