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차 접어든 프리즈 서울 … "소문난 잔치, 볼거리는 여전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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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F-프리즈 서울 2024]프리즈 하이라이트터닝 포인트.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삶에서 ‘결정적 분기점’을 만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미술의 지난날을 톺아본다면, 프리즈의 서울 상륙은 하나의 ‘사건’이다. 아트바젤과 함께 글로벌 아트페어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프리즈가 서울에서 열린 순간 대중과 오랜 시간 유리돼 있던 미술은 모두가 즐기는 축제가 됐다. 태생적으로 ‘그들만의 리그’라는 편견을 품을 수 밖에 없는 미술이 외연을 확장하게 된 것. 내로라 하는 미술관과 갤러리가 공 들여 준비한 전시들이 인파로 붐비고 주식, 부동산과 함께 그림이 투자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진 건 프리즈 서울을 전후해 벌어진 일이다.
5년 계약 반환점 돈 프리즈 서울
글로벌 주요 갤러리, 불황에도 서울로 출석도장
'서울서만 볼 수 있는 작가 소개하자' 분위기도
홍콩은 커녕 일본이나 중국, 싱가포르에도 밀려 변방 취급을 받은 한국 미술시장이 ‘1부 리그’로 승격하며 아시아 미술 허브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도 프리즈 서울의 영향이 크다. 해외에 나가야만 볼 수 있던 글로벌 명문 화랑들이 앞다퉈 서울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타데우스 로팍, 화이트 큐브, 탕 컨템포러리, 마시모데카를로 등이 삼청동, 한남동, 청담동에 자리 잡았다. 올해도 프리즈 기간에 맞춰 마이어 리거가 강남에 문을 열고, 세계 최고 화랑으로 꼽히는 가고시안도 한국에서 첫 전시를 연다.한국 미술시장에 변화의 방아쇠를 당겼던 프리즈 서울이 오는 9월 세 번째 아트페어를 연다. 서울 진출 당시 KIAF와 맺은 5년 계약의 반환점을 도는 만큼, 올해 행사는 앞으로도 서울이 프리즈를 품을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결정적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30개국 110여개 갤러리 참가 '라인업 화려'
프리즈 서울이 단순히 미술 작품들이 늘어선 ‘미술 장터’가 아닌 ‘요즘 잘 나가는 미술’을 오감으로 느끼는 장(場)인 이유는 참가 갤러리의 라인업이 화려하기 때문이다. 세계 4대 화랑으로 꼽히는 하우저앤워스, 가고시안, 페이스, 데이비드 즈워너가 올해도 어김 없이 참여하는 등 30개국에서 온 유수의 갤러리 110여 곳이 참가한다.특히 리슨, 페이스, 스푸르스 마거스, 타데우스 로팍 등 아트페어의 격을 높이는 저명한 갤러리 상당수가 꾸준히 프리즈 서울에 명함을 내밀고 있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지난 1년 간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미국 뉴욕에서만 20개 갤러리가 문을 닫는 등 불황이 현실화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시점에서도 적잖은 비용을 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다.이 중 리슨 갤러리는 사라 커닝햄, 라이언 갠더, 나탈리 뒤버그와 한스버그, 아니쉬 커푸어 등 거장 반열에 오르고 있는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을 갈무리했다. 특히 사라 커닝햄의 대형회화인 ‘Channel Crossing’이 눈에 띈다. 푸른 색조가 돋보이는 배경 위에 강렬한 오렌지와 핑크색 붓터치가 커닝햄만의 독특한 회화적 접근을 잘 묘사했단 평가다. 오는 10월 프리즈 런던 기간 리슨 갤러리 런던 지점에서 열리는 레이코 이케무라의 작품도 프리즈 서울에서 먼저 소개된다.
한국 미술 애호가들과의 소통도 눈에 띈다. 단순히 수익을 내기 위한 부스가 아니라 한국에서 열리는 미술 전시와 맥락을 같이하는 작품을 선보이는 갤러리들이 있어서다.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한 화이트 큐브는 최근 국내에서 열린 개인전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은 마르게리트 위모의 신작 ‘the twist’를 건다. 위모는 9월 7일부터 열리는 광주비엔날레에도 참여한다.국내 컬렉터들에게도 이름이 잘 알려진 세실리 브라운이 소속돼 있는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한 폴라 쿠퍼 갤러리는 아트바젤 홍콩에서 프리즈 서울로 ‘환승’한 화랑이다. 개념 미술과 미니멀 아트에 집중해 온 폴라 쿠퍼는 1980년대부터 한국 컬렉터들과 교류해 왔고, 청계천 복원을 상징하는 조형물인 ‘Spring’을 만든 클라스 올덴버그 등이 전속 작가란 점에서 한국 시장에 매력을 느꼈다는 게 이유다. 이번 프리즈 서울에선 올덴버그를 비롯해 백남준, 칼 안드레 등 거장의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실속 있는 작품, 韓화랑 보는 재미도
그간 프리즈 서울에선 얼마짜리 작품이 바다를 건너 오느냐가 주요 관심사였다. 갤러리마다 얼마나 짜임새 있는 부스를 구성했고, 한국 컬렉터를 공략하기 위해 효과적인 전략을 구상했는지를 평가하기보단, 얼마짜리 작품을 공수해왔는지에 더 이목이 쏠리는 등 유독 숫자에 민감한 경향이 나타났다. 이런 대작에 집착하는 분위기로 지난 2년 간 프리즈 서울하면 떠오르는 색깔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문제는 아시아권 경쟁 지역인 홍콩과 달리 한국 미술시장은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작품이 잘 팔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프리즈 서울에 참가하는 한 갤러리 관계자는 “한국 시장은 소위 100억 원대의 초고가 작품이 팔릴 만큼 구매력이 높지는 않다”면서 “비싼 작품이 화제를 낳는 건 맞지만, 실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론 갤러리나 컬렉터에게 실패로 남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 시장의 특성을 반영하지 않고 값비싼 작품에만 열광하는 분위기에선 프리즈 서울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미술계 안팎에선 국내 컬렉터들이 주저 없이 지갑을 열 수 있는 실속 있는 작품들이 프리즈 서울에 걸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컬렉터들이 유망한 신진 작가의 작품에도 과감히 투자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임연아 필립스옥션 서울사무소 대표는 “한국 컬렉터들은 5~10년 뒤 두각을 드러낼 것 같은 작가들을 고르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다만 외국계 갤러리 잔치가 될 것이란 당초 우려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프리즈 서울에서 국내 화랑들이 점차 두각을 드러내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우환이나 박서보, 김창열처럼 잘 알려진 작가들의 작품만 거는 게 아니라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작가를 소개하자’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아트바젤에서 소개했던 전준호 작가의 솔로 부스를 꾸리는 과감한 선택을 한 갤러리현대가 대표적이다.이 밖에도 리안갤러리는 실험미술 거장인 이강소의 조각과 회화를 소개하는 동시에 인물을 바라보는 구도가 인상적이란 평가를 받는 네덜란드 화가 카틴카 램프의 작업을 섞었다. 학고재는 김환기 ‘피난열차’, 백남준 ‘구 일렉트로닉 포인트’, 신상호 ‘백자’를 소개하며 국내외 컬렉터를 상대로 한국 미술의 역사성을 강조할 계획이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