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에 미쳐 치어리더가 된 거제도 여고생들의 무용담
입력
수정
영화 '빅토리' 리뷰거제의 한 오락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맞춰 접신이라도 한 듯 펌프를 하는 두 소녀. 실력도 있고 열정도 대단하지만 이들에게는 학교(와 펌프를 할 수 있는 오락실)를 제외하고 마땅히 춤을 출만한 공간이 없다. 그래서 이들의 주 무대는 교실 안 칠판 앞. 칠판 앞에서 대열을 잡으면 교복을 입은 관중들이 떼로 모여들고, 모두가 사랑했던 그 음악, 그리고 춤이 시작된다.여름 시장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영화 <빅토리>는 1999년, 거제를 배경으로 한다. ‘필선'(이혜리)과 '미나’(박세완)는 거제가 인정하는, 아니 거제상고가 인정하는 나름 저명한 댄스 듀오다. 그들은 춤 연습실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학교가 들어주지 않자, 서울에서 전학 온 ‘세현'(조아람)을 내세운 치어리딩 동아리를 만들어 축구광 교장 선생님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동아리의 멤버를 구하기 위한 오디션은 오합지졸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가까스로 제구실을 할 만한 9명이 선정되면서 치어리더팀 ‘밀레니엄 걸즈’가 탄생한다. 한편 만년 꼴찌인 거제상고 축구부에 공격수의 에이스인 세현의 오빠 동현이 합세하면서 축구팀에도 그럭저럭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젠 밀레니엄 걸즈의 활약만 남았다.우선 춤 영화와 스포츠 영화의 '혼종'이라고 할 수 있는 <빅토리>는 각 장르의 클리셰들을 적잖이 보유하고 있다. 가령 꼴찌 팀이 의기투합하여 극적으로 우승을 한다는 설정, 댄스팀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오디션 설정 (이러한 오디션에서 으레 등장하는 괴짜들, 그리고 그들의 조악한 퍼포먼스), 또는 갈등으로 인해 팀이 해체 위기에 처한다는 설정 등은 숱한 선례들에서 사용되었던 관습들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그 관습적인 클리셰들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패턴을 보여준다기보다 이러한 관습들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필요한 타이밍에 장르적 클리셰를 배치하지만 이러한 설정들은 <빅토리>만의 하이브리드적인 감성으로 재탄생한다.
장르적 클리셰 활용해 하이브리드적 감성 창출
'하여가', '나를 돌아봐' 등으로 90년대 감성 자극
거제도 조선소 노동자들의 애환도 조명
가장 결정적인 예는 앞서 언급한 오디션 씬, 즉 멤버를 영입하는 과정을 그리는 부분이다. 팀을 구성하는 멤버들 중 제대로 된 춤사위 (각기)를 구사하는 인물은 한 명뿐이다. 대신 누군가는 태권도로, 또 다른 누군가는 음악 믹싱 기술로, 이들은 언젠가는 써먹을 만한 소소한 재주로 발탁된다. 이러한 ‘다양성’의 이슈는 영화 <빅토리>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의 메인 캐릭터 9명의 소녀는 전형적인 ‘예쁜 소녀’의 이미지를 어떻게든 피해 가는, 동시에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각자의 사랑스러운 개성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강형철 감독의 <써니>와 비슷하지만 캐릭터는 훨씬 더 독립적이고 유쾌한 인물들로 진일보했다).<빅토리>는 예상외의 복병이다. 2022년 개봉했던 영화 <육사오>가 그랬듯, 탑티어 배우 한 명을 찾아볼 수 없지만, 컨셉과 이야기, 그리고 음악만으로도 영화는 대단히 만족스럽다. 특히 춤이 메인인 영화이니만큼,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를 필두로 듀스의 ‘나를 돌아봐’, 디바의 ‘왜 불러’, 지니의 ‘뭐야 이건’ 등 90년대를 ‘풍미’했던 가요들의 향연은 관객석에 차분히 앉아 있는 것이 고문에 가깝도록 느껴지게 한다.동시에 영화에는 예상치 못한 서브플롯이 존재하는데 바로 조선소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소녀들의 아버지 캐릭터들로 대표되는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의 필러라고 하기엔 매우 빈번히, 중요한 대목으로 등장한다. 아마도 춤과는 무관해 보이는 ‘거제’라는 배경은 분명 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재현하기 위한 장소적 설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빅토리>가 다루는 조선소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영화의 중추인 ‘춤’만큼이나 중요한 화두라고 할 수 있다.복병은 늘 숨어있는 법이다. 여름 대작들 사이에서 비교적 조용하게 개봉한 영화 <빅토리>가 그렇고, 이 영화가 뿜어내는 주옥같은 음악과 춤 사이에 포진해 있는 조선소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그렇다. 간만에 찾아온 이러한 복병을 마주하지 않는 것은 당신의 ‘직무유기’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