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잡아라" 10조 베팅한 SK…삼성도 반격 나섰다 [황정수의 반도체 이슈 짚어보기]

'제2의 HBM' 기업용 SSD
AI 시대 맞아 서버용 수요 급증

SK, 10조 투자 솔리다임 통해 공략
삼성, 11월 최대 용량 제품 출시 추진
사진=연합뉴스
"SK하이닉스의 약점은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적어도 2020년까지는 반도체 업계에서 이 말이 통했다. SK하이닉스는 당시 D램에선 20~30%대 점유율로 세계 2위, 낸드플래시 단품에선 10%대 시장 점유율로 3~4위권을 지켰다. 하지만 낸드플래시 기반의 데이터 저장장치인 SSD에선 속절없이 밀렸다. 2020년 2분기 기준 SK하이닉스의 SSD 점유율은 7.1%로 5위. 세계 1위 삼성전자(34.1%)와의 격차는 27%포인트에 달했다.

SSD 약했던 SK, 10조 투자해 인텔 SSD사업 인수

SK하이닉스가 SSD에서 약했던 이유론 '솔루션' 경쟁력이 꼽혔다. 최근 낸드플래시는 단품으로 공급되지 않고 '컨트롤러'와 컨트롤러를 제어하는 소프트웨어 역할을 하는 '펌웨어'와 함께 '솔루션'으로 고객사에 제공된다. SSD가 대표적인 사례다.

컨트롤러는 SSD의 속도 등 성능을 제어하는 핵심 칩이다. 예컨대 낸드플래시가 책을 꽂아놓는 서재라면 컨트롤러는 데이터를 언제 어디에 넣고 끄집어낼지를 결정하는 사서 같은 역할을 한다. 또 에러를 수정해주고, 수명을 연장해준다. 삼성전자는 2000년대 초부터 컨트롤러 기술에 투자해 현재 1000명 이상의 전문 인력이 컨트롤러만 개발했지만 SK하이닉스는 달랐다.

SK하이닉스가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2010년대 들어서부턴 SK하이닉스도 솔루션 경쟁력 강화에 주력했다. 2012년 6월 이탈리아 아이디어플래시, 미국 LAMD를 인수했다. 2년 뒤인 2014년 5월엔 미국 바이올린메모리 PCle 부문을 인수했고 같은해 6월엔 벨라루스의 소프텍 펌웨어사업부를 샀다. 화룡점정은 2020년 10월 현재의 솔리다임인 인텔 낸드플래시·SSD 사업부를 인수한 것이다. 90억달러, 당시 환율로 약 10조20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거래였다. 단순히 점유율을 높이는 게 아니라 인텔의 솔루션 경쟁력에 베팅한 것으로 평가됐다. "SK하이닉스의 SSD 사업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AI 시대 SSD 수요 폭발, 솔리다임 2분기 780억 순이익

기대와 달리 솔리다임은 고전했다. 메모리 업황 부진에 생각하지 못했던 비용이 나가며 인수 이후 3년 넘게 연속 적자(순이익 기준)를 냈다. 'SK의 실수'란 평가가 나왔다. 당시 인수를 주도했던 경영진들은 SK하이닉스 본사에서 솔리다임 등으로 밀렸다.

지난해부터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가 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낸드플래시의 고대역폭메모리(HBM)’로 불리는 기업용 SSD(eSSD) 수요가 폭발하고 있어서다. eSSD는 저전력 낸드플래시로 만들기 때문에 자기장 디스크를 활용하는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보다 크기가 작고 전력도 적게 쓴다. 빅테크들이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리는 인공지능(AI) 서버의 전력 소비를 줄이기 위해 eSSD 사재기에 나섰다.
SK하이닉스 자회사 솔리다임의 64TB SSD. 솔리다임 제공
솔리다임은 최근 품귀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AI 서버용 고용량 eSSD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기업이다. 세계 최대 용량인 60TB대 eSSD 생산을 가장 먼저 시작한 기업이 솔리다임이다. 비결은 솔리다임이 중국 다롄 공장에서 생산하는 쿼드러플레벨셀(QLC) 낸드플래시다.

QLC 낸드는 기본 저장 단위인 셀에 4비트를 저장할 수 있다. 비트 2개를 저장할 수 있는 멀티레벨셀(MLC), 3비트를 저장하는 트리플레벨셀(TLC) 낸드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 그래서 구글, 아마존 같은 미국 빅테크는 물론 델 등 서버기업도 솔리다임에 “다른 회사보다 먼저 60TB eSSD를 납품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서버에서 전력 소모가 많은 HDD를 대체하기 위해서다.eSSD 사업이 커지면서 솔리다임은 올 2분기에 순이익 786억5000만원을 기록했다. 2021년 2분기 이후 12분기 만의 흑자 전환이다. 영업이익은 올 1분기에 이어 두 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김석 SK하이닉스 낸드플래시 마케팅담당 부사장은 지난달 25일 실적설명회에서 “2분기 eSSD 매출은 전 분기 대비 50% 늘었고 올해 연간 기준으론 작년의 네 배 가까이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와 솔리다임은 내년 초에 128TB eSSD를 출시할 계획이다. 256TB 제품도 준비 중이다. AI 서버의 효율성이 향상되고, 이는 곧 전력 사용량 감소로 연결된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알릴 계획이다.

SK그룹은 AI 시대에 eSSD 수요가 계속 급증할 것으로 보고 솔리다임을 뉴욕증시에 상장해 투자금을 확보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솔리다임 상장을 주문한 건 SK그룹 최고경영진인 것으로 알려졌다. 4년 전 SK하이닉스의 솔리다임 인수가격(약 10조원)과 미국 웨스턴디지털(WDC) 등 낸드플래시 경쟁사의 시가총액(17일 기준 209억달러, 약 28조원) 등을 감안할 때 솔리다임의 현재 기업가치는 20조~30조원에 달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전통의 강자 삼성, 128TB 승부수

원래 eSSD 시장에서 전통의 강자는 삼성전자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3년 4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41.7%, SK하이닉스와 솔리다임의 합산 점유율은 31.2%다. QLC 기반 eSSD 시장에선 솔리다임에 밀렸지만 전체 eSSD 시장에선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절치부심한 삼성전자는 반전을 위한 카드를 내놨다. 지난 6∼8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서 개최된 '플래시 메모리 서밋(FMS) 2024'에서다. 삼성전자는 FMS 2024에서 보란듯이 eSSD 신제품을 공개했다. 용량은 모델별로 16TB~128TB다.

64TB 고용량 제품은 지난달 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연속 읽기·쓰기 속도는 각각 7.2GB/s, 2GB/s로 전 세대 제품 대비 2배 수준이다. 임의 읽기 속도는 4배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의 QLC 기반 128TB 기업용SSD.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는 128TB 제품을 SK하이닉스보다 빠른 오는 11월께 출시 예정이다. 이 모델은 최대 7.5GB/s의 연속 읽기 속도와 최대 3GB/s의 연속 쓰기 속도를 자랑한다. 괴물 같은 성능을 기록한 삼성전자의 BM1743은 이번 FMS에서 '가장 혁신적인 메모리 기술상'을 수상했다.

삼성전자의 신제품 'PM1753'도 관심을 모았다. 이 제품은 생성형 AI의 추론(서비스)과 학습에 최적화된 제품이다. 기존 PM1743 대비 전력효율과 성능이 각각 최대 1.7배 향상됐다.

짐 앨리엇 삼성전자 반도체(DS)부문 미주총괄 부사장은 "AI 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메모리반도체의 성장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며 "삼성전자는 연구개발과 기술리더십으로 저전력 기반 고성능 제품과 함께 생산능력을 선도하겠다"고 말했다.

글로벌 eSSD 시장 매년 60% 증가

eSSD가 제 2의 HBM으로 꼽히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란전망이 나온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AI 서버용 SSD 시장에서 올해 2분기부터 16테라바이트(TB·1TB는 1024GB) 이상 고용량 제품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며 "엔비디아의 H100, H20, H200 시리즈 AI 가속기가 출시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고용량 SSD에 대한 주문이 늘었다"고 설명했다.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최근 "올해 AI 서버용 SSD 조달 용량이 45엑사바이트(EB,1EB=104만8576GB)를 초과할 것"이라며 "향후 수년간 AI 서버의 SSD 수요가 연평균 60% 이상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