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셀 신입'과 '주판 부장' 이야기 [이윤학의 일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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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이야기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일하다 보면 자연히 같은 업계 사람이나, 다른 업계에서 일하더라도 실력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중에 우군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아는 애널리스트 후배 얘기입니다. 이 친구는 실력도 좋지만, 인성도 좋았습니다. 언제나 기업의 리포트를 발간하면 그 기업의 주식 담당 임원에게 사후에 자세히 설명을 해줬습니다. 사후에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애널리스트 많지 않습니다.

왜 실적 추정을 이렇게 했는지, 밸류에이션(기업가치 평가)을 할 때 디스카운트를 한 이유가 무엇인지 등등. 이 애널리스트에게 박하게 평가받은 기업의 임원들은 처음엔 서운해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오히려 서로 신뢰를 쌓게 되지요. 그래서 이 친구 주변엔 여의도 사람이 아닌, 자신이 담당했던 업종 등 제조업 지인들이 참 많습니다. 그것도 깊은 신뢰를 쌓은 우군들이지요.그런데 나중에 이 친구가 영업부서로 발령이 나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거의 20년간 기업 분석을 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영업을 하라니 막막해집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기업이 이 친구에게 최고재무책임자(CFO) 자리를 제안하게 됩니다. 그동안 찬찬히 이 친구를 지켜보던 해당 기업의 대표가 누구보다도 회사를 잘 알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결정을 내린 거지요.

이렇게 진정성을 가지고 일을 하다 보면 그동안 쌓아온 인간관계나 네트워크가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게 회사에 다니며 얻어지는 것이지요 이건 그냥 봉급만 받고 일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회사는 사람에 투자합니다. 대개 기업은 회사의 미래를 위해 인재를 육성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회사가 사람에게 투자한 콘텐츠는 어디에 쌓일까요? 회사의 창고에 쌓이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나에게 쌓이지요. 마치 무용과 무용수를 서로 떼어놓지 못하듯, 회사가 미래를 위해 투자한 콘텐츠는 고스란히 머릿속에 남습니다. 어느 순간 회사를 떠나야 할 상황이 오더라도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까지 내놓으라고 할 순 없지요. 그러니 회사에서 월급만 받는 사람은 크게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겁니다.저는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의 대명사 '엑셀'이 국내에 도입된 후 처음 사용한 1세대입니다. 또 MS워드가 국내에 도입될 때 사내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기도 했죠. 그 후에 도입된 파워포인트나 인터넷을 사용한 것으로도 1세대입니다. 이 모든 게 일하면서 배운 지식이 제 머리에 몸속에 체화되어 있습니다. 그냥 봉급만 받고 일하겠다고 새로운 지식, 새로운 문물을 거부했던 사람들은 그 이후엔 봉급도 못 받는 신세가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1990년대 증권사엔 대졸 여성 직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상업학교를 나온 여직원들이 대다수였는데 주산 몇단은 물론, 타자 1급증을 기본으로 가진 대단한 타자수들이었지요. 실제로 나이는 저보다 한살 아래이지만 입사 6년 차인 선배도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 입사 초기엔 동생뻘에 업무를 배우고, 나이 많은 오빠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연출되곤 했지요. "대학을 나왔는데, 그것도 몰라요?" 이 말은 그들이 신입 사원인 저의 군기를 잡는 데 사용되곤 한 말인데, 제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이기도 했지요.

드디어 역전의 시기가 도래합니다. 업무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거지요. PC가 보급되면서 처음엔 부서당 1대가 지급되더니 얼마 후 3대, 5대, 그러다 결국 1인 1PC 세상이 열렸습니다. 문서 작성과 편집기능이 탁월한 워드프로세서 세상이 열렸지만, 그동안 타자기에 익숙했던 직원들이 문제였어요. 타자 실력은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고, 거부하기도 했지요. 제가 아무리 가르쳐 준다고 해도 끝까지 거부한 '왕언니'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본인의 주특기를 버리면 존재 가치가 없어진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엑셀이 도입된 후에도 비슷한 일들이 나타났지요. 수치 계산, 통계, 도표 작업 등이 용이한 스프레드시트로 리포트를 만들어 가면 어김없이 부장님은 서랍 속에서 쓱 주판을 꺼내서 한참을 검산하곤 했습니다. "이 어려운 통계를 어찌 이리 빨리했나?"라며 늘 못 미더워 주판으로 검산하시던 부장님도 사실은 그 옛날 주산 몇단으로 특채된 분이셨거든요. 분명히 회사는 그분들에게도 공부하고 배울 기회를 줬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현행화(現行化)에 실패한 거지요.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계속 현재에 맞게 적응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기존에 하던 일을 봉급 받은 만큼 하겠다고 생각하고 새롭게 일을 배우지 않은 겁니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실 말이 쉽지, 현행화는 생각보다 녹록지 않습니다. 혹자는 '현재를 유지하는 게 혁신'이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그 정도의 노력은 자신을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꼭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노하우가 내 몸에 남기 때문이지요. 저는 엑셀도, 워드도 파워포인트도 인터넷도 모두 회삿돈으로 배웠습니다. 결국 회사에 다니면서 현행화한 것들이 모두 저의 노하우이자 무기가 되었지요. 그래서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도 보다 빨리 엑셀로 작업하고, 인터넷에서 넓고 깊게 검색도 하고, 더 멋지게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서 베스트 애널리스트도 되었지요. 모두 다 회사에서 공짜로 배운 것으로 말입니다.

이미 우리나라엔 '조용한 퇴직'이 널리 퍼진 것 같아요. 2021년 기준 우리나라는 연간 노동 시간이 1910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37개국 중 네 번째로 노동 시간이 많습니다. 그런데 노동 생산성(2022년 기준)은 33위로 최하위권에 있습니다. 일하는 시간은 긴데, 생산성은 바닥이라는 이야기지요. 사실상 '조용한 퇴직'이 이미 진행 중임을 보여 주는 지표입니다.저는 일이 주는 세 가지 가치를 통해, 소명 의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커리어(Career)로서 자기 성취감을 가져 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최소한 단지 호구지책인 'Job'으로써 일하기엔 너무나 크고 소중한 가치들이 많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돈, 연봉, 성과급, 승진, 그런 것은 그냥 다 따라옵니다. 먼저, 일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대문입니다. 거기서 새로운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다양한 새로운 것을 배우게 해줍니다. 단지 호구지책의 봉급쟁이로 살아서는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입니다.

인간이 죽을 때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 '일'이랍니다. 80세까지 산다면 일하는 시간은 27년, 잠자는 시간은 26년이랍니다. 잠은 피로 해소와 활력 등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며 본능적이고 불가피한 것이지요. 그런데 인생에서 일하는 시간이 잠자는 시간보다 더 많아요. 그리고 일은 본인의 생각에 따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는 선택적인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 우리는 어떻게 일해야 할까요?

<한경닷컴 The Moneyist> 이윤학 전 BNK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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