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족함에 다다랐음에도 우리는 왜 노동을 그치지 않는가 [탐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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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재현의 탐나는 책고전적인 정전 위주의 접근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한 시대에 발표된 모든 소설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도살장으로서의 문학장을 환기한 ‘멀리서 읽기distant reading’로 널리 알려진 프랑코 모레티를 나는 교양소설에 대한 진지한 분석인 <세상의 이치>(문학동네)로 처음 접했다.
많은 말을 하고 싶게 만드는, 지극히 '문제적인' 책
프랑코 모레티, ,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24
어린 아이가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성장하여 끝내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교양소설, 일견 선형적이고 평면적인 기획 이면에 유럽의 어떤 정치 사회적인 맥락이 얽혀 있었는지 그 복잡하면서도 명쾌한 해석에 감탄했지만, 특히 나를 사로잡은 것은 부록의 후기 교양소설에 대한 설명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교양소설이 실패한 것은 자명하다. 바꿔 말하자면 교양소설은 시대가 흐르면서 결국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없었다. 교양소설이 그 동력으로 삼은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는 제1차세계대전의 전운 앞에서 바스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전쟁의 냄새를 맡고, 미리감치 표현하고 있었다.
괴테와 토마스 만의 자신감은 어느덧 로베르트 발저(<벤야멘타 하인학교>) 카프카(<실종자>), 로베르트 무질(<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제임스 조이스(<젊은 예술가의 초상>) 등에서 나타나듯 혼란스러움, 자괴감, 퇴행, 자기학대 등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토록 후기 교양소설의 ‘반영웅anti hero’들에게 끌렸던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수천 km, 100여 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설명이 지금 이 한국에서도 유효하다고 느꼈던 것이다.문학은 삶을 닮고, 비평은 문학으로부터 삶을 건져낸다는 진실을 모레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모레티가 2013년에 펴낸 <부르주아>가 몇 년 전 번역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참아보려 했지만 결국 원서를 구입했고, 책이 손에 들어오고 나니 마음이 놓여(?) 읽는 것을 언제까지고 미뤄두고 말았지만…… 분명 시의적일 이 책을 내가 무척 좋아할 것을 알면서도 부채감 가운데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올해 번역이 된 것이다.많은 이가 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혐오하고, 따라서 누구도 스스로가 그런 존재라고 자임할 수도 없는 존재인 부르주아. 태초의 부르주아는 분명 정치적 가능성을 지닌 살아 있는 계층이었지만, 그들은 어느새 ‘자본’에 집어삼켜지고 만다. 그들은 지배계급과 빠르게 결탁해 전쟁을 정당화했고, 부르주아 대신 ‘중간층’이라는 익명—그것은 '상층'으로의 편입을 용이케 한다—아래 숨었으며, 상품을 물신화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누구보다도 빨리 내재화했다.모레티에 따르면 <로빈슨 크루소>(다니엘 디포)는 그와 같은 흐름을 예증하는 소설이다. 낯선 무인도의 땅을 개척하기 시작하는 크루소는 어느 순간 이후로는 이미 풍족함에 다다랐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그치지 않는다. 실로 그렇지 아니한가. 고소득을 올리는 전문직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많이 노동한다. 시급으로 따지면 최저 시급만도 못할 것이라 우스개로 말하는 그들은 그렇게 많이 벌고 있음에도 왜 그토록 많이 노동해야 할까?
‘게으름’으로부터의 탈피이기도 한 크루소의 근면은 모든 가치를 ‘유용성’에 둔다. 다른 무엇으로 이어지지 않는 노동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다음날, 가장 가까운 미래에만 집중하게 된다. 크루소의 매일매일이 바로 당장의 어떤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되듯이. 그때 유용성의 목적은 단지 ‘편안함’을 이루는 데 있다.이미 생존에 필요한 것은 갖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에게 다른 것을 상상하고 사고할 정신적 여유를 허락하기보다 가정에서의 편안함이라는 이미지를 위해 더 많은 노동으로 스스로를 몰아치는 것이다. 크루소의 그것이 개인을 사회에 흡수시키고 고정시켜 다시 재생산으로 이끄는 사회구조—자본—의 알레고리임은 명백하다.
<로빈슨 크루소>뿐만 아니라 제인 오스틴과 조지 엘리엇, 플로베르에 이르러 그러한 부르주아적인 삶과 가치가 어떻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후 완전히 전면화되었는지 밝혀진다. 더 이상 웃지 않고 진지한 부르주아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시끌벅적한 카니발에 거리를 두고 지배계급으로 향하는 도중이고, 단지 ‘충전재’에 불과한 부르주아적인 일상을 서사에서 뚝 떼어내 오롯이 일용하며, 그 연장선상에서 지극히 국지적인 ‘정확’에 천착하며 전반적인 ‘의미’를 불투명하게 만든다(어떤 종류의 도무지 못 알아먹겠는 묘사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가 다시 감상적인 ‘도덕’과 합세해 어떻게 반전되었는지도.모두가 자발적 노예가 되지 못해 안달인 자본(주의)에 대해 ‘낯설게 하기’로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21세기 문화의 새로운 과제에 대해 두루 좋은 매뉴얼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저자는 지난 40년간 ‘빅토리아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지 않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라고 말하는데, 지난 30여 년 동안 우리의 ‘민족문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연구’ 또한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지 않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지 않았을까?
_옮긴이 서문
우리가 놓여 있는 조건을 정직하게 헤아리는 이 지극히 문제적인 책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다…… 발자크,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특히 입센으로 이어지는 후반부에서 수많은 레퍼런스를 얻을 수 있었다. 입센이 이렇게나 ‘자본주의 정신’과 ‘부르주아 리얼리즘’을 제대로 구현해내는 작가였다니, 좋은 비평을 만날 때마다 그러듯이 무심코 지나쳤던 작가를 다시 눈여겨보는 계기로 다가왔다. 또 다른 책을 읽고 싶게 되는 것, 그것은 다가올 시간에 대한 산뜻하고 즐거운 기대와 다르지 않다.
이재현 문학동네 국내문학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