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니와 닮은 듯 다르다…강유진 표 ‘수영장’의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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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랑 '환상의 파편: 풍경의 새로운 시각'영국의 세계적인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87)한테 명성을 안겨준 건 1960년대 '수영장' 시리즈였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정취에 매료된 그는 현지의 수영장을 화폭에 옮겼다. 쏟아지는 햇볕과 약간의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일렁이는 물은 까다로운 소재다. 작가가 수영장에 푹 빠지게 된 이유다.
강유진 작가 유년의 기억 투사한 수영장
정원, 호텔 등 실제 관찰한 공간과 콜라주
한국 작가 강유진의 수영장 그림은 호크니와 비슷하면서 다르다. 호크니가 수영장을 통해 LA 타지 생활의 이국적인 낭만을 옮겼다면, 강유진의 수영장은 어릴 적 뿌리로 회귀하는 작가의 여정이다. 금세 마르는 아크릴 물감 대신 두꺼운 에나멜페인트를 고수한 것도 차별화되는 지점 중 하나다.'강유진 표 수영장'의 세계 일주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 펼쳐졌다. 작가가 지난해 미국 버지니아의 레지던시에 머물며 영감을 얻은 신작을 포함해 30여점이 걸렸다. '환상의 파편: 풍경의 새로운 시각'이란 전시 제목이 암시하듯 작품에는 실제 풍경과 초현실적인 이미지가 뒤섞였다. 도심, 공항, 정원 등 외국의 풍경과 작가의 기억에 자리 잡은 수영장 이미지를 나란히 놓은 결과다.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는 줄곧 떠돌이 생활을 겪었다. 유년기에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 머물렀다.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이어 유학길에 올라 영국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순수예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결혼한 뒤로도 배우자와 함께 뉴욕과 유타, 네바다 등 미국 곳곳을 옮겨 다녔다. 최근 정착지는 미국 버지니아다.본격적으로 수영장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중반 영국 유학생 시절이다. 습하고 흐릿한 기후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난히 밝고 쨍했던 어느 날 수영장을 찾았다. 다섯살 무렵부터 늘상 취미로 찾아온 수영장이었다. 삶의 터전은 바뀌었지만, 6개 남짓의 25m 레인에서 비춰 보이는 건 작가 본인의 모습이었다.여느 동네 실내 수영장처럼 평범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강 작가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눈이 소복이 쌓인 설산과 용암이 분출하는 화산, 차분한 호텔 실내 등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엉뚱하게 들어선 수영장이 단번에 눈길을 끈다. 이번 신작에도 제프 쿤스, 베르나르 브네 등 작가가 공원에서 만난 거장들의 조각 옆에 그의 수영장이 등장한다.공업용 에나멜페인트를 재료로 선택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에나멜페인트는 발색이 진한 대신 일반적인 유화 물감에 비해 건조에 필요한 시간이 길다. 물결에 비치는 순간적인 햇살을 포착해 표현하기에 불리하다는 얘기다.
작가는 오히려 재료 본연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단점을 극복했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거나 흘러내리게 하는 표현 기법을 활용하면서다. 그의 작품 속 산맥은 녹아내리는 케이크를 연상케 하고, 평면의 캔버스에 담긴 수영장엔 깊이감이 감돈다. 작가가 "(나의 작품에서) 재료의 물성이 모든 것에 앞선다"고 말할 정도다.강 작가의 작업은 해외에서 마주친 광경을 카메라에 옮기는 것에서 시작한다.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여러 이미지를 콜라주하고 밑그림을 시작한다. 캔버스를 이젤에 걸지 않고, 바닥에 수평으로 눕혀둔 채 작업한다. 워낙 무거운 재료의 성질 탓에 페인트가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이후 캔버스를 좌우로 기울이며 물감이 불규칙하게 흐르는 패턴을 덧입힌다.
물도 물 나름이다. 일본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선박을 삼킬듯한 집채만 한 파도를 그렸고, 클로드 모네는 버드나무 잎사귀가 하늘거리는 고요한 연못을 그렸다. 강 작가가 바다나 강가가 아닌 수영장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적응하면서 살았습니다. 물도 어느 그릇에 담기는지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죠. 수영장 물의 이러한 특성이 저와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전시는 9월 14일까지.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