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리언의 아버지, 그로테스크의 제왕 H.R 기거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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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 '제노모프' 탄생의 일등공신에이리언을 탄생시킨 것은 리들리 스콧이다. 크리쳐의 이미지를 만든 것은 스위스의 초현실주의 화가 H.R.기거(1940~2014·한스 루돌프 루어디 기거)이다. 말이 초현실주의 화가이지 한 마디로 광인이다. 포르노그래피 적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미국 뉴욕의 로버트 메이플쏘프를 연상시키지만, 그보다 더욱 기괴(geek)하다. 정상이 아니다. 그런데 예술적이다. 비평가 프랑크 리날리는 기거 작품을 원형으로 한 다양한 변형 모방 작품들을 싸잡아 ‘기거레스크(Gigeresque)하다’고도 했다. 미친 예술가는 작품을 즐기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일상을 공유하면 안 된다. 삶이 망가질 수 있다. 이런 화가나 이런 화가를 쓰는 감독이나 만약 영화를 안 했다면 미쳤을 수도 있다. 그만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나온 상상력이 에이리언이라는 이미지였다. 얼마나 강한 캐릭터였으면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50년 가까이 대중들은 스스럼없이 그 이미지를 소비하며 살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철저하게 당대 최고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한편으로는 ‘스타워즈’의 제다이가 있었다면 또 한편으로는 식인 상어 ‘죠스’가 있었으며 저쪽 또 한 구석에서는 ‘매트릭스의 네오가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모든 상상력을 아우르는 것이 이 에이리언이었던 셈이다. 살바도르 달리도 알아본 ‘꿈의 화가’
스위스 출신의 그로테스크 화가
어린 시절 악몽의 반복 그림으로 승화
수많은 모방 낳아 '기거레스크' 단어도
헐리우드 성공 후 유럽 미술계는 외면
1998년 스위스 작은 마을의 성 사들여
자신의 컬렉션 한 곳에 모은 '기거 박물관'
H.R 기거는 스위스 동부의 오래된 도시 쿠어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친구들이 장난감 자동차를 갖고 놀 때, 그는 트럭에 해골을 싣고 다녔다. 약사였던 아버지의 소장품이었다. 그는 8살 때 박물관에서 이집트 미라와 석관을 보고 “내 생애 가장 강렬한 경험 중 하나였다”고 했다. 스스로 옷을 고를 나이가 되어선 검정색 옷만 입었고, 산책은 해가 진 뒤에야 나갔다고. 그의 상상력은 꿈에서 비롯됐다. 어린 시절부터 악몽과 이상한 꿈들을 반복적으로 꾸던 작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이 두려움을 떨쳐냈다. 어두운 색조와 흑백의 톤이 어우러진 그림들이 아직도 다수 남아있다. 기거는 스스로를 “나의 꿈, 프란츠 카프카, 프로이드 심리학, 러브크래프트 등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취리히 응용예술학교에서 건축과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1960년대 중반 시각예술을 전업으로 삼기 시작했다. 잉크 드로잉과 유화로 작업하다 이후 에어브러시를 사용해 그렸다. H.R기거를 알아본 건 20세기 가장 중요한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였다. 달리는 기거의 작품을 미국 화가 로버트 베노사를 통해 처음 알게 됐고, 프랭크 허버트의 SF소설 <듄>(1965>의 각색을 시도하던 칠레 감독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에게 기거의 작업을 소개하기도 했다. 기거는 “열두 살 때 살바도르 달리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작품을 보고 악몽같은 공포에 매료됐다. 그 공포를 2차 대전의 잔학상과 결합시키려고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달리가 추진했던 이 프로젝트는 중단됐지만, 만약 계획대로였다면 에이리언보다 먼저 H.R기거가 영화 세계에 발을 들였을 지 모른다. 리들리 스콧 “진정한 독창적 천재”
리들리 스콧 감독이 H.R기거를 알아본 건 그의 주요 컬렉션을 모은 책 <네크로노미콘>이었다. 에이리언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인데, 이 책의 타이틀도 공포작가 H.P.러브크래프트의 세계에서 마법의 가상 책을 참조한 것이었다. 리들리 스콧은 에이리언 제작과 관련한 서명을 마친 뒤 20세기 폭스 사무실의 책상 위에 있던 이 책의 사본을 보고 H.R기거에 대해 완전한 확신을 가졌다. 이들을 이어준 네크로노미콘 시리즈는 인류 출현 이전의 외계 종족과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상상의 신화인 ‘크툴루 신화’에 뿌리를 둔다. 네크로노미콘은 ‘죽은 자의 가면’이라는 뜻. 그의 화집 안에서 인체와 기계를 결합한 표현력이 극강에 달했다. 에이리언은 사실 시나리오가 1960년대 중반에 이미 만들어졌지만 정작 마땅한 에이리언이 없어 아무도 손대려하지 않았던 작품이다. 리들리 스콧에 의뢰했을 때 마침 당시 작가 중 한 명이던 댄 오배넌이 기거를 찾아냈다. 에이리언 초안 3점은 초기 1000달러에 주문했고, 고소 공포증이 있어 비행기 타기를 두려워하던 기거를 스콧이 직접 찾아가 설득한 뒤 영국 스튜디오로 데려왔다는 일화도 있다. 11개월간 꿈틀대는 뇌, 혀에 이빨을 다는 방법 등을 철통 보안 속에 기거와 협업한 리들리 스콧은 그에 대해 “진정한 예술가이자, 기괴하고 독창적인 천재다. 그리고 정말 멋진 남자다”라고 회고했다. 스위스 우아한 성 안에 ‘기거 박물관’ 1980년 영화 ‘에이리언’에서 괴물 에이리언을 만들어 오스카 상을 수상하자, H.R 기거는 하룻밤 만에 전 세계적인 유명인이 됐다. 하지만 진지한 예술계, 특히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현대미술계는 그의 작업을 폄훼하기 시작했다. 한때 고야나 피라네시의 작품과 함께 그의 작품을 전시하곤 하던 갤러리들도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말년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고 알려졌다.
주류 미술계의 푸대접 때문이었을까. 그는 헐리우드 대저택을 사는 대신 스위스 프리부르의 작은 마을인 그뤼에르 중심, 생 제르망 성을 샀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신의 작품을 사모아 1998년 기거의 컬렉션으로 가득 찬 박물관을 만들었다. 올해는 기거가 세상을 떠난 지 10주기가 되는 해다. 지금도 기거 박물관에는 뒤통수가 툭 튀어나온 검정색 머리, 셀 수 없이 많은 날카로운 이발, 매끄러운 피부에 가시돋힌 몸체와 긴 꼬리를 가진 제노모프가 살고 있다. 박물관의 전시실 건너편엔 그의 작품들로 꾸며진 바(Bar)도 있다. 술을 한잔 마시며 가짜 뼈로 만든 아치 지붕과 시체의 두개골로 가득한 선반 등을 바라보면 그의 말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만일 내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 창조적인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미쳤거나.”
김보라 기자·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