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왕국의 민낯…아시아 유일의 '수포자'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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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INSIGHT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00년부터 2022년까지 3년마다 주요국의 만 15세 학생을 대상으로 읽기, 수학, 과학 성취도를 평가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를 실시해왔다. 이 평가는 각국의 교육정책 수립에 중요한 기초자료로 활용돼왔다. 지금까지 총 8회의 평가가 시행됐으며, 인적 자원을 국가경쟁력의 핵심이라고 여겨온 한국은 그간의 모든 평가에서 높은 성취도를 보였다.
20년치 'OECD 학업성취도 평가' 분석
韓, 20년간 수학 성취도 하락
일본·대만·싱가포르 등 주요국
집중 투자로 10년 동안 상승
기초 부진한 한국, 점점 떨어져
엇갈린 국가별 ‘교육 성적표’
가장 최근 시행된 ‘PISA 2022’에는 전 세계 2900만 명을 대표해 81개국에서 약 70만 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치러진 첫 대규모 평가다. 작년 12월 발표된 PISA 2022 결과에 따르면 한국과 함께 우수한 성과를 보인 국가는 싱가포르, 마카오, 대만, 일본, 홍콩 등 아시아 국가들이다.이들 국가의 성공 요인으로는 교육에 대한 높은 기대와 강도 높은 학습 환경, 그리고 수학·과학 교육의 집중적 투자가 꼽힌다. PISA 2022는 지난 20년간의 성취도 추이 분석을 통해 각국의 미래 교육정책 방향을 제시한다. PISA에서 최상위 성취를 보인 아시아 6개국의 장기 성취도 추이는 국가별로 차이가 있으며, 이는 각국의 미래 교육 전망을 예측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취도가 꾸준히 향상된 곳으로는 마카오와 싱가포르를 꼽을 수 있다. 마카오는 지난 20년간 읽기에서 12점, 수학에서 25점, 과학에서 32점 상승했으며, 싱가포르는 읽기에서 17점, 수학에서 13점, 과학에서 19점 올랐다. 일본과 대만은 20년 동안 비교적 안정된 성취도를 유지한 안정형 대표주자다.
韓, 기초학력 부족자 급증으로 성취도 하락
반면, 그간의 높은 성취 수준에도 불구하고 하락세를 보여 우려의 시선이 늘어난 국가도 있다. 바로 한국과 홍콩이다. 홍콩은 2014년 민주화 운동인 ‘우산 혁명’이 좌절한 이후 읽기에서 25점, 수학에서 10점, 과학에서 22점 하락했다. 이는 정치적 불안정이 교육 현장의 질적 저하를 초래한 결과로 해석된다. 한국은 읽기에서 10점, 수학에서 15점 떨어졌다. 과학은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아시아 6개국 중 수학 성취도가 꾸준히 하락한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며, 최근에는 읽기 성취도까지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한국이 평균 점수에선 여전히 ‘우수’하지만 장기적으로 하락세를 보이는 것은 하위권 학생들의 성적 저하와 하위권 비율 증가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한국은 아시아 6개국 중 읽기, 수학, 과학 세 영역 모두에서 하위 10% 학생들의 성취 수준이 꾸준히 저하된 유일한 국가다. 반면 마카오와 싱가포르는 수학과 과학에서 하위권 성적이 향상됐고, 일본과 대만은 하위권 성적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읽기, 수학, 과학에서 하위권(레벨2 이하) 비율이 증가한 국가는 한국과 홍콩뿐이다. 한국은 10년간 읽기, 수학, 과학 하위권 비율이 각각 7.0%, 7.1%, 7.1% 증가했다. PISA는 레벨2 이하 성취를 보인 학생들을 기초학력 부족으로 간주하며, 향후 학습에서 성공하기 어려운 학생으로 평가한다.
한국 교육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수학이다. 한국은 아시아 6개국 중 수학에서 하위권 비율이 증가하고 상위권 비율이 감소한 유일한 국가다. 한국은 사회·경제적 배경과 관계없이 모든 학생의 수학 성적이 하락하고 있다. 특히 성취도 하위 10% 학생의 성적 하락 폭이 상위 10% 학생의 성적 변동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상위권과 하위권 학생 간의 교육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수학 교육 혁신 없으면 수준 하락 불가피”
PISA의 수학 평균 성취도 추이(2000~2022년)는 한국 수학 교육의 문제를 명확히 보여준다. 한국은 수학 교육의 근본적인 혁신 없이는 현재의 성취도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홍콩의 성적 하락은 정치적 불안정에 기인하지만, 한국은 20년 동안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였기에 수학 교육의 혁신이 절실하다.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교육당국이 추진한 수학교육과정의 난도 하향 조정이나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심화수학을 제외하는 정책은 오히려 PISA 장기 추이 결과에 역행하는 처사라고 볼 수 있다. 세계 선진국들은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중심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국가경쟁력의 기초를 수학 교육 강화에서 찾고 있다. 한국이 미래사회에서 국가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도체와 AI산업의 기초가 되는 수학 교육의 혁신이 시급하다.
수학뿐만 아니라 읽기와 과학 영역에서도 기초학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지원할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방치하면 국가경쟁력이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교육당국은 지난 20년간의 성취도 하락 추세에 대해 전문가 분석을 통해 학년별, 교과별, 개인 특성별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교육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처방을 제시하고, 이에 따른 교육개혁을 시급히 추진해야 한다.정권마다 바꾼 대학입시 정책…기초학력 교육은 30년전 수준
선행학습 등 사교육 과열에도 기초학력 보장 시스템은 부족
상위권·하위권 교육격차 커져…맞춤 교육 프로그램 만들어야
최근 발표된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20년 장기 추이 분석 결과는 한국 교육의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읽기, 수학, 과학 전 영역에서 하위권 학생들의 성취도가 하락했고, 하위권 비율도 증가했다. 특히 이는 학생들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무관하게 나타나, 교육 시스템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시사한다.
국가 수준의 학업성취도평가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2011년부터 2023년까지 중학교 3학년 학생의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국어와 수학에서 각각 6배, 3배 이상 증가했으며,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기초학력 저하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1995년 한국은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5·31 교육개혁을 추진했다.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인재 양성을 목표로 삼아 학교의 자율화, 학생 중심 교육, 선택형 교육과정, 대학입시의 다양화, 지방자치제, 자유학기제 등 다양한 교육정책을 시행했다. 이런 정책들은 시대적 요구에 부합했으나, ‘모든 학생’의 기초학력을 보장하는 중요한 교육목표가 간과됐다. 그 결과가 이번 장기 추이 분석에서 확인됐다.
지난 20여 년간 보수와 진보 정권을 오가며 대학입시, 사교육, 자율형사립고 등 교육 문제가 정치 이슈화됐고, 교육정책의 일관성은 부족했다. 교육 불평등 문제는 소득 격차와 같은 양극화 이슈에만 집중됐으며, 정작 교육 시스템 전반의 기초학력 보장체제 부실 문제는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학생 수 감소로 교사가 하위권 학생들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내 하위권 학생을 위한 지원체제는 여전히 미흡했다. 대학입시 경쟁이 과열되면서 사교육을 통한 과도한 선행학습이 이뤄졌고, 기초학력이 부족한 하위권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더욱 소외됐다. 이에 따라 하위권 학생들은 공교육과 사교육 모두에서 중위권으로 도약할 기회를 잃었다. 한국 학생들의 높은 평균 점수와 국제평가에서의 상위 랭킹은 이런 문제를 가려왔으나, 그 이면에서 하위권 학생들은 점점 더 배제되고 상위권 학생들과의 격차가 커졌다.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초등학교 단계에서 기초학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조기에 발견해 이들을 위한 맞춤형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싱가포르의 LSP(Learning Support Programme)처럼 학습이 느린 학생들에게 개별 학습을 지원해 이들이 초등학교 초기부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중·고등학교 단계에서도 하위권 학생들에게 집중된 핀셋형 교육 지원이 절실하다.
채선희 중앙대 교육학과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