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오면 난리"…1100억 쏟아부은 세운상가 충격 근황 [혈세 누수 탐지기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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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km 길이 세운상가 공중보행로 논란
이용도 저조한데 누수 문제까지 발생
"비 오면 아주 난리가 나. 웅덩이까지 생긴다고."
최근 무더위에 비가 내린다는 소식을 많이 이들이 반겼지만, 세운상가 상인들은 아닙니다. 비가 안 내려도 누수가 있는데, 비가 오면 공중보행로 아래로 누수가 더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세운상가 공중보행로는 혈세 1109억원이 쓰였는데도 당초 예측 통행량의 10% 수준에 그쳐 '혈세 누수' 논란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누수도 만연했습니다.
최근에는 시가 2017년 준공 전 타당성 조사도, 사업 추진도 '졸속'으로 무리하게 밀어붙였다는 감사 결과까지 나와 온갖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한경 혈세 누수 탐지기(혈누탐)팀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끝없이 논란을 만드는 '애물단지' 세운상가 공중보행로의 근황을 살펴봤습니다.
'냉무'
20~21일에 걸쳐 혈누탐이 찾은 이곳. 종묘~세운상가~청계·대림상가~삼풍상가·PJ호텔~인현·진양상가까지 7개 건물, 1㎞를 남북으로 잇는 이 공중보행로는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때인 2016년 3월 세운상가 주변을 보존하기 위한 도시재생사업 일환으로 추진돼 2022년 7월 준공됐습니다. 기존 상가 콘크리트 데크 양옆에 철재 구조물을 덧붙이고, 건물과 건물 사이는 철골조 다리로 이었답니다.기자는 종로3가역에서 내려가 세운상가 앞으로 갔지만, 을지로3가·을지로4가·충무로역 등 4개 역이 둘러싸고 있어 어느 역에서든 길어야 200m 정도만 걸으면 이 보행로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앞에는 종묘 세계문화유산까지 있지만, 이곳까지 발걸음을 잇는 이는 거의 안 보였습니다.최근 감사원 자료에 따르면 이곳 공중보행로의 보행량은 당초 예측의 10분의 1 수준에 그쳤습니다. 동서를 합치면 하루 평균 10만명이 넘을 것으로 예측했으나, 실제로는 1만을 조금 웃도는 수준에 그친 것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측정한 결과는 아니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서울 열린데이터광장 통계에서 비슷한 '시간대'에만 인근 명동 관광특구가 약 7만명, 종로·청계 관광특구가 3만명대, 동대문 관광특구가 2만명대로 나타나는 걸 감안하면 낮은 수준으로 보입니다.이곳은 공중보행로만 있을 뿐, '콘텐츠'가 없었습니다. 마치 이메일이나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물을 열어봤을 때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 같은 '냉무' 같이 말이죠. 수년간 지속된 공사와 1m당 1억원이 넘게 예산이 들어서 무언가 더 만들 여력이 없었던 걸까요. 보행로 아래 1층 조명 가게에나 차나 사람이 좀 다니지, 3층은 더욱 썰렁했습니다. 곳곳에는 빈 가게가 있었고, 그나마 허공을 채우는 건 담배를 피우러 나오는 상인들뿐이었습니다. 2층에 해당하는 중간층에는 관리사무소와 화장실이 있는데, 공간 활용도가 매우 떨어져 보였습니다.이곳을 정말 살려볼 생각이 있었다면 보행로만 놓지 말고, 각 보행로에 남는 공간에 팝업스토어 식으로 청년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나 의류 쇼핑몰 등을 유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랬어야 할 자리에 덩그러니 '전자박물관'이 있다니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실제 이곳에서 청년들이 운영하는 몇몇 카페나 음식점들은 굉장히 '힙'한 느낌이었습니다. 잘 살렸더라면 '홍콩'의 감성이 느껴졌을 것 같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공중보행로가 홍콩에 있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연상시킨 점을 생각하면 살릴만한 감성이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았습니다.첩첩산중
혈세만 누수된 줄 알았는데 최근에는 배관 누수 현상도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20일 보행로 아래 1층의 한 상인 A씨는 "저기 봐봐요"라며 한 곳을 가리켰습니다. 보행로 아래 누수로 고드름이 생긴 것입니다. 이날은 비도 안 온 날이었습니다. A씨는 "비가 오면 보행로서부터 물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바닥이 움푹 팬 곳에는 웅덩이도 생긴다"며 "비 한 방울 없는 날에도 저렇게 누수가 발생하는 곳이 한둘이 아니다"고 토로했습니다. 전반적인 배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서울시도 실태조사를 한 상태입니다. 시 관계자는 "현재 검사만 마친 상태"라고 전했습니다.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한 상인은 "이곳 생긴 다음에 1층은 공기가 너무 안 좋다"라고 하소연했습니다. 또 다른 상인은 1층이 너무 어둡다는 점도 상기시켰습니다. 상인들에 따르면 이곳에는 시에서 설치해준 환풍기가 있었지만 고장 난 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공기도 안 통하는데, 에어컨 실외기까지 위치하고 있어 1~2층 공기는 건물 밖보다도 덥고 안 좋았습니다.안전상의 문제도 제기됩니다. 재작년 이곳에선 한 60대 여성의 발등 위로 80kg에 달하는 건물 콘크리트 외벽 일부가 떨어지면서, 이 여성은 발가락 4개를 절단해야 하는 큰 중상을 입기도 했습니다.최근 감사원 보고서에서는 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사업을 추진하던 당시 서울시가 자체 투자심사 결과를 여러 차례 무시하며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고, 사업비도 약 300억원을 더 늘렸다는 것입니다. 당시 투자심사위원회에는 사업성 부족, 콘텐츠 개발, 과도한 사업비 등을 지적했지만 서울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감사원은 "보행 예측량의 11%에 불과한 등 공중보행로 조성사업에 총사업비 1109억원을 투입하고서도 당초 사업의 목적인 보행량 증대를 통한 세운상가 및 주변 지역 재생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홍콩은커녕 '대못'으로 전락
일대 재개발에 나선 오세훈 시장의 '녹지생태도심' 프로젝트에도 걸림돌입니다. 건축계 일각에서는 세운상가로 인해 강북 성장이 지체됐다면서 비판적인 시선도 보냅니다. 유현준 홍익대 교수는 지난해 자신의 유튜브 '셜록현준' 영상에서 세운상가를 언급하며 "뭔가를 연결시키고 싶으면 건물을 오히려 부수고 비워야 한다"며 "세운상가 리모델링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걸로 강북은 20년 뒤처졌다"라고 평가했습니다.서울시의회는 지난 4월 도시계획균형위원회에서 "세운상가 군을 단계적으로 공원화하여 서울을 대표하는 녹지 축을 조성하고 공원과 녹지를 중심으로 문화 및 상업, 업무 인프라를 확충하도록 하겠다"고 논의했습니다.
상인들은 먹고사는 일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상가 철거는 물론 보행로 철거도 반대라는 입장입니다. 안석탑 세운상가협의회 회장은 "시에서 아직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며 결사반대를 외쳤습니다. 기존 상가군 자체로도 재개발 추진이 쉽지 않은데, 공중보행로까지 생겨 철거비는 물론 상인들과의 협상이 이중삼중으로 어려움이 생긴 셈입니다.
오죽하면 오 시장이 이 공중보행로만 보면 "대못"이라고 표현했을까요. 혈누탐이 회차를 거듭할수록 우리는 체감하고 있습니다. 뿌리는 사람과 치우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요. 오 시장은 2022년 4월 기자 설명회에서 "솔직히 말해 철거돼야 할 운명"이라면서도 "적어도 허물려면 매입이 완료돼 영업하는 임차인이 퇴거해야 허물 게 아니냐. 그게 준비되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린다고 보고 10년 동안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대못' 빼야 하나…어떻게
건축계에서는 세운상가를 바라보는 눈빛이 애처롭기만 합니다. 안형준 건국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세운상가도 여러 재개발 계획안이 나오고 있는데 어떤 방향이든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충분한 실증 절차를 거쳐야 졸속 행정이라는 비판받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세운상가가 서울시 전체에서 주목하는 입지인 만큼 개발 밀도나 강도, 녹지 비율 등에 대해 다각도로 의견을 수렴하고 미래 수요 전망 등을 충분히 숙고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도대체 이곳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10년이 됐든 언제고 철거될 때까지 방치해야 할까요. 취재를 끝마치고 철수할 무렵, 공중보행로에 위치한 한 건축물에 이런 문구를 발견했습니다. "괜찮아. 지금처럼만 하면 돼". 혈누탐팀은 세운상가만큼은 어떤 방식이든 지금처럼만 아니면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신현보/김영리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