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양반의 한탄 "빚 독촉이 끊이질 않아…330냥만 있었으면" [서평]
입력
수정
1924년 사망한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자신의 일기, 편지, 미발표 소설 등을 모두 불태워달라고 했다. 하지만 유언 집행자이자 친구인 막스 브로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덕분에 지금 우리는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 조선 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바로 조병덕(1800~1870년)이란 사람이다. 그의 조상은 17·18세기에 걸쳐 화려한 지위를 누린 노론 화족이었다.
“편지 불태워라” 말 안 들은 아들 덕에 드러난 조선시대 양반의 민낯
하영휘 지음
궁리
344쪽|2만5000원
그러나 할아버지, 아버지, 조병덕 삼대는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위 ‘몰락 양반’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한성(서울)에서 남포현 삼계리(충남 보령시 미산면 삼계리)로 이사한 것도 몰락 양반으로서는 한성 생활을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학문에 전념한 조병덕은 대신 편지를 많이 썼다. 전국 각지의 사람들과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중에서도 주요 수신자는 둘째 아들인 조장희였다. 무려 1700여 통, 6일에 한 번꼴로 보냈다. 지금까지 발견된 조선시대 개인 서간문으로는 최대 분량이다. 조병덕은 “이 편지는 모두 잘라 끈으로 만들거나 불태워라. 내 필적을 남에게 보이지 마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조장희는 아버지 편지를 고이 간직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양반의 모습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양반의 초상>은 19세기 조선 유학자 조병덕이 가족에게 남긴 편지를 분석한 책이다. 고문서를 통해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인문학자인 하영휘 가회고문서연구소장이 썼다. 하 소장은 “편지는 일기만큼 내밀한 글”이라며 “체면과 명분을 빼면 시체라 할 수 있는 옛날 조선시대 양반 역시 편지를 쓰며 민낯을 드러냈다”고 했다. 그는 “조병덕의 편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19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가 밤낮 빚 걱정에 시달리는 모습을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한다.
편지 속에는 고매하고 점잖은 양반의 모습 대신, 민초와 똑같은 고민을 하는 한 인간이 담겨 있다. 막막한 생계와 빚 걱정, 속 썩이는 아들에 대한 꾸지람, 만성 신경성 설사로 고생하는 처지, 위계질서가 무너진 사회에 대한 한탄 등 조병덕은 붓끝에 개인사와 시대사를 허심탄회하게 쏟는다. 한 편지에선 “오직 네 형수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가 없고도, 또 어찌할 수가 없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재앙을 부를 것은 뻔하다. 재앙이 반드시 오든 안 오든, 지금 이 모양이 바로 하나의 큰 재앙이다”라며 고부간 갈등을 한탄한다. 또 “동서남북 빚 독촉이 끊이지 않아 큰일이다. 330여 냥을 벗어나게 해준다면 나를 기사회생시키는 것이지만 차마 편지로는 쓰지 못하겠구나”라며 막막한 생계를 고민하는 모습도 보인다. “마음 씀씀이가 부잡스러워 공경하는 마음이 이렇게나 전혀 없고서 어떻게 사람이 되겠느냐? 네 일을 생각할 때마다 밥을 먹어도 달지 않고 잠을 자도 편안하지 않다”며 사고를 치는 둘째 아들이 착잡한 부모의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조병덕은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던 해 태어났다. 세도정치기와 맞물려 부패와 민란으로 들끓는 사회를 살아가야 했다. 안으로는 크게 홍경래의 난과 진주민란이 일어나고 밖에서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병인양요가 발발하면서, 19세기 조선은 뒤흔들렸다.
이런 세태를 반영한 대목도 편지에 나온다. “근자에 독서종자가 완전히 말라버려 나라의 근본이 폐해를 입으니…나라와 사람이 제구실을 못 하는 것은 모두 삼강오상의 도가 쇠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양반들이 벼슬과 과거 공부에만 몰두하면서 학문을 하는 독서종자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조병덕은 과거 공부와 학문을 닦는 것을 구분하는데, 전자가 양반이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유자(유학을 공부하는 선비)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비록 삼계리에 은거하며, 농사지으며 먹고사는 것을 고민하지만, 학문을 놓지 않은 유학자라는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