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유럽 최장' 볼가江을 품고도 땅이 더 필요한가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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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가강을 통해 본 러시아 역사
자넷 M. 하틀리 지음
이상원 옮김/북스힐
596쪽|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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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넷 M. 하틀리 영국 런던정치경제대(LSE) 명예교수가 쓴 <위대한 볼가강>은 볼가강을 통해 7세기부터의 러시아 역사를 탐구한다. 저자는 “볼가강 없이 러시아 역사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볼가강은 러시아 심장부를 관통하는 러시아인들의 젖줄이자, 땅이 정복되고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는 격변의 중심지였다”는 것이다. 책은 볼가강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사건과 문화적 발전을 체계적으로 조명하고, 볼가강이 러시아에 끼친 영향을 설명한다. 여느 나라가 그렇듯 러시아도 처음엔 영토가 크지 않았다. 1200~1500년대 모스크바 대공국이라 불리던 시절의 땅은 모스크바 인근과 북쪽으로 한정됐다. 그러다 점점 영토를 늘렸다. 가장 손쉬운 길은 볼가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영토 확장과 함께 여러 민족이 편입됐다. 러시아는 순수한 슬라브족의 나라가 아니다. 타타르족, 추바시족, 모르도바족, 우드무르트족, 카자흐족 등 많은 소수 민족이 함께 살고 있다. 볼가강 유역을 편입한 결과다.
확장한 영토를 지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자국민 이주다. 러시아도 그랬다. 많은 러시아 농민이 강제로 강 중류와 하류 지역에 정착했다. 지주들이 비옥한 땅을 노리고 자기 농노를 이곳으로 옮겼다. 1719년 그 수는 거의 50만명으로 늘어났고, 18세기 말에는 러시아인이 볼가강 중류 인구의 64%, 하류 인구의 71%를 차지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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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유럽과 맞먹을 정도로 문화가 발달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볼가강 지역을 낮잡아 봤지만, 볼가강 인근은 운송의 이점을 바탕으로 빠르게 발달했다. 19세기 수로 무역의 3분의 1이 볼가강을 통했다. 1895년엔 러시아 증기선의 50% 이상이 볼가강을 오갔다. “하나 같이 번영하고 부유하며 점점 더 크고 아름다워지는 볼가의 도시들은 모두 어머니 볼가 덕분이다. 크고 작은 수많은 배들이 뒤덮은 장엄하고 매력적인 볼가여!”라는 당시 기록은 과언이 아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벌어진 내전에 볼가강도 휘말렸다. 공장이 많았고, 운송의 중심이었기에 볼셰비키의 적군과 이에 대항한 백군이 모두 볼가강 지역을 노렸다. 처음엔 백군이 우세했지만, 결국 적군이 승리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오던 백군이 볼가강에서 합류하지 못한 것이 내전 결과를 크게 좌우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볼가강 거점 도시인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려 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을 점령하면 러시아의 남북 운송을 끊을 있었고, 소련군을 강 동쪽으로 몰아내면 방어선을 구축하기 쉬웠다. 반대로 소련군은 탈환이 어려웠기 때문에 어떻게든 사수에 매달렸다.
볼가강 유역은 여전히 러시아의 농업과 산업 중심지지만, 옛날만큼 큰 관심을 못 받고 있다. 철도 등장 후 수로 운송의 중요성이 줄어들었고, 국가가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은 탓이다. 소련 통치하에서 공장 폐수가 마구 버려지기도 했다. 러시아는 자신들이 가진 보물을 아끼지 않은 채 다시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